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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엔 고시생 빼고 다 있다?

고시생 공부방에서 일용직 등 저소득층 보금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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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06호 박성훈⁄ 2009.02.24 14:25:09

단어 자체만 보면 고시원은 고시생을 위한 곳이다. 상술하자면, 사법고시·행정고시 등 어려운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과 노력이 필요한 학생들이 공부하면서 기거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시험준비가 아니더라도 학습을 위한 공간이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요즘 고시원은 여러 직종의 저소득층이 모여 사는 합숙소가 됐다. 1980년대 초반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둥지를 틀기 시작한 고시원은 80~90년대를 거치며 각 대학 주변으로 퍼졌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집이 없는 빈곤층이나 학생들이 머무는 곳으로 바뀌었고, 서서히 지하철역 부근이나 주택가에 들어섰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대학가의 일부 고시원이 매월 40만~60만 원의 고급형으로 변하면서 양극화가 이뤄졌다. ■ 경제 침체되면 고시원은 우후죽순 경제 상황의 침체기마다 고시원을 찾는 사람들은 늘어난다. 10년 전의 IMF 당시가 그랬고, 작금의 현실이 그렇다. 집값이 폭등하고, 이혼율이 늘어나고,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유입되면서 값싼 숙박시설의 수요가 급증했고, 숙박형 고시원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국고시원협회는 현재 서울에만 3900여 개, 전국적으로 6200여 개의 고시원이 있으며, 지금도 매년 500∼600여 개 가량이 개업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소방방재청도 최근 조사에서 서울지역 고시원 이용자만 10만8428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해, 고시원 이용자는 전국적으로 20만 명 가까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고시원의 폭발적 증가에는 법령상의 이점도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고시원은 다중주택과 달리 근린생활시설로 분류되기 때문에, 몇 세대 당 한 대 꼴로 주차장을 확보해야 할 필요도 없고, 숙박시설과 달리 상업지역이 아닌 주거지역에서도 운영할 수 있다. 소방시설 설치 신고와 사업자 등록만 마치면 영업을 할 수 있다는 점, 정식 임대사업자보다 세금도 다소 적게 낸다는 점 등 역시 고시원이 급증하게 된 배경이다. 이런 가운데, 침대·공동화장실·공동주방 등 숙박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저렴한 가격에 장기간 이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고시원을 찾고 있는 실정이다. ■ 일용직 등 빈곤층의 보금자리 고시원에는 일용직 노동자, 가난한 학생, 시골 출신 젊은이, 독거노인 등 보증금을 낼 만한 형편이 못 되는 이들이 기거한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의 조사에 따르면, 고시원에 머무는 사람들의 직업으로는 회사원·단순노무직 등의 직군이 57.3%, 학생과 취업준비생 등의 직군이 42.7%로 나타나, 숙박을 위한 직군이 학습직군보다 많았다. 지난 7~8월에 비슷한 조사를 벌인 경기도 지역에선 숙박형 직군이 73%에 육박했다. 또, 한 취업 포털 업체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최근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서 대학가의 자취생 중 17.1%는 비싼 방값으로 인해 ‘고시원 생활을 알아보고 있다’고 응답하여 대학가의 고시원 쏠림 현상도 가속화될 전망이다. 서울 강동구에 위치한 고시원에 사는 김모 씨는 일용직으로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 산다고 한다. 그는 “이혼으로 가정이 깨지고 직장에서도 퇴직 당하면서 결국 이곳으로 오게 됐다”며 “날품팔이로 일이 있을 때에만 나간다”고 말했다. 이 고시원의 창문 없는 방의 월세는 12만 원이다. 창이 있으면 그마저도 3만 원이 비싸다. 그래도, 오갈 데 없는 서민들에게 이 정도의 월세는 일반 월셋방이나 하숙집 등과 비교할 때 월등히 저렴하다. 김 씨는 “이만한 돈으로 살 수 있는 데가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영등포의 한 고시원에 사는 박모 씨는 “좁은 것만 빼면, 혼자서 조용히 살 수 있고, 비용도 저렴해 그리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 같은 나라 출신끼리 사는 고시원도 최근 들어서는 국내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해외동포 등 새로운 유입자들이 고시원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꾼다. 경기 안산시 원곡동 등지는 거주자 3만873명 중 외국인이 9672명으로 30%를 넘어섰다. 이곳에 있는 고시원들은 대부분 재중 동포와 이주노동자가 뒤섞여 살고 있다. 그야말로 ‘다국적 고시원’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 사람들만 모여 사는 고시원도 있다고 한다. 고시원 입구엔 러시아어 전단지가 놓여 있고, 복도에는 중국어 경고문이 붙어 있는 곳도 있다. 이런 고시원에서는 외국인들끼리 외로움을 덜고 일자리 정보를 나눈다. 임동근 안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상담팀장은 “원곡동에만 고시원이 25개를 넘었다”며 “두어 해 사이에 빠르게 늘었다”고 전했다. 고시원·독서실 등 비주거용 건물이나 여인숙·여관 등 숙박업소에 사는 이들을 ‘불안정 주거층’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인구조사에도 잡히지 않는다. 앞으로 다국적 고시원은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의 숙식비를 사업주와 노동자에게 ‘사이좋게’ 분담시키자는 정부 안이 나온 탓에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지금은 관행상 회사가 숙식비를 부담하기 때문에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이마저 ‘유료’가 된다면 고시원 거주자는 늘어날 것이다. ■ 고시원은 소방법 사각지대 고시원은 개정된 소방법이 지난해 5월 30일 시행되면서 다중이용업으로 분류돼 화재 관련 시설을 완비해야 한다. 소화기와 유도등, 휴대용 비상전용등, 비상구 등을 설치하고 완비 증명을 받아야 영업이 가능하다. 하지만 법 개정 전부터 영업을 시작한 곳은 지금도 소방·방화시설 설치 의무가 1년 동안 유예돼 화재예방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소방검사 역시 소방서별로 연초에 계획한 특별검사를 하고 있을 뿐 별도의 정기검사를 하지 않는다. 잇따른 화재에서 보듯 고시원은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2008년 7월 25일 새벽 경기도 용인의 한 고시텔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40분 만에 7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 그 6일 후에는 서울 도선동에 있는 한 고시원에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에도 누군가 방화를 저질러 참사가 빚어질 뻔했지만, 이전의 사고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인지 누군가 화재의 징후를 먼저 파악하고 주변에 알려 참사는 면할 수 있었다. 화재가 발생한 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라 대부분 출근한 시간이어서 고시원에 사람이 많지 않았고, 불을 피해 2층에서 뛰어내린 사람 등 2명만 입원해 치료를 받는 정도에 그쳤다. 고시원은 숙박시설이 아니라 소방기준도 허술하다. 그래서 한 해 500~600개씩 우후죽순 생겨난다. 고시원에 대한 법적 근거가 불명확하거나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2~3년마다 수시로 발생하는 고시원 참사는 소방법 개정의 필요성을 환기한다. 또, 소방시설에 이상이 없더라도, 비좁은 통로와 다닥다닥 붙은 창 없는 방 등 고시텔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로 대형 참사가 빚어진다. 2007년의 논현 고시원 화재사건도 그렇고, 2004년 수원의 한 고시원에서 4명이 화재로 숨졌을 때에도, 정부는 고시원에 대한 법적구제안을 만들겠다며 법안 검토에 착수했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난 후 고시원 화재에 대한 여론이 잠잠해지면서 고시원 관련 법률에 대한 논의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006년 7월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4층 건물에서 불이 나 3~4층 고시텔에 기거하던 8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정부는 다시 ‘관계법을 만들겠다’며 ‘고시원업에 대한 법적 규제안’을 제기했다. 고시원이 어느 법에도 규제 규정이 없는 신종 업종이기 때문에 6.6㎡(2평)도 채 못되는 쪽방을 제도권 안에 관리하겠다는 취지에서다. ■ 고시원은 업종·건축 허가 대상 아니다 실제로 고시원이나 고시텔은 건축허가나 업종허가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즉, 허가를 받지 않고도 시설을 설치해 영업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러하니 업주들은 한 공간에 보다 많은 방을 만들기 위해 칸막이를 좁게 설치하고 결국은 다리도 제대로 뻗을 수 없는 좁은 방을 갖출 수밖에 없다. 또, 대부분의 고시텔은 복도의 폭이 1m가 안 될 정도로 좁을 뿐 아니라 창문도 없다. 정부의 입법 추진이 지지부진하자 소방당국은 ‘다중이용업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의 소방시설 완비증명 제도를 근거로 고시원의 소방시설을 점검, 규제하고 있다. 하지만 소방법은 소방시설만 규제하기 때문에 통로나 면적에 대해선 속수무책이다. 한편,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1월 숙박업과 이·미용업 등이 포함돼 있는 공중위생관리법에 고시원업을 포함시키는 내용의 개정법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17대 국회가 끝나면서 자동폐기돼 입법화되지 못했다. 보건복지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현재 주거지역에 있는 고시원이 75%가 넘어 법 개정이 있지 않는 이상 숙박업 전환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건축물 종류는 근린생활시설이 77.9%, 교육 및 연구시설 5.9%, 단독주택 5.8%, 숙박시설 0.35% 등으로 제각각이다. 고시원을 독서실로 전환하는 방안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저렴한 숙박시설이 없어져 고시원을 이용하던 서민들이 길거리로 내몰려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고시원은 자유업종이어서 주차장을 신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현재 고시원은 전국적으로 6,000개가 넘고, 그 중 86%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고시원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관련법이 너무 많이 걸쳐 있어 쉽게 해결하기 힘들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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