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 관계에서 ‘갑’은 항상 ‘을’보다 유리한 위치에 선다. 병원에선 원칙적으로 돈을 내는 손님이 갑이 돼야 하지만, 실제로는 병원·의사가 절대적 ‘갑’이다. “제발 고쳐주십사”고 탄원하는 쪽 환자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원에서도 환자가 ‘갑’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있으니, 바로 병이 걸린 상태가 아니라 혹시 병이 걸린 게 아닌가 해서 찾아가는 건강검진 때이다. 이때는 아프지도 않은 상태에서 수십만~수백만 원의 목돈을 내고 검진을 받기 때문에 손님은 절대적인 ‘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손님을 맞으면서도 항상 ‘절대적 갑’의 위치를 지켜온 병원의 버릇은 건강검진에서도 발휘될 때가 많다. 수십만 원짜리 건강검진을 한 뒤 의사에게 듣는 소리라고는 “이상 없다”거나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추가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한마디에 불과하고, 상담시간도 5분이 채 안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손님이 ‘갑’ 되는 유일한 경우 더구나 그동안 각 병원의 건강검진센터는 수익을 늘리기 위해 직장인 대상의 단체 건강검진 사업을 적극 유치했다. 직장인 검진은 많은 사람을 싸게 검진해주기 때문에 병원 입장에선 ‘빨리빨리’ 작전으로 나서기 쉽다. 이렇게 회사 단위의 단체 건진이 있는 날에 ‘생돈’을 내고 건강검진을 받는 중간에 끼게 되면, 돈은 돈대로 수십만 원을 내면서도 단체 검진자들처럼 허둥지둥 검사실을 빠른 속도로 통과하는 황당한 경험을 하게도 된다.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건강검진하다 보면 오진도 나오게 되고, 건강검진을 받은 사람 입장에서 불평이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이런 불만 요인을 정확히 집어내 개선함으로써 소비자 만족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수익 증대 효과까지 거둔 병원이 있으니, 바로 여성건진센터를 특화한 이대목동병원이다. 이 병원은 ‘여자대학교 부설 병원’이라는 특징을 살려, 철저하게 ‘여자’에 초점을 맞췄다. 아프지 않은 상태에서 검사를 받는 건강검진에서는 여자가 절대적으로 발언권을 가진다는 현실에 착안한 개혁이었다. 이대병원 건강증진센터(소장 김정숙)는 우선 전문 컨설팅 업체에 의뢰하여 문제점을 파악했다. 드러난 문제점은 △동시에 검진받는 사람 숫자가 너무 많고 △가운을 입은 채로 남녀가 섞여 검진을 받으니 서로 불편하고 △검사를 끝낸 뒤 설명이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세 가지였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 이대병원은 과감한 ‘수술칼’을 들이댔다. 먼저 너무 많은 사람이 줄을 서는 원인이 되는 단체 검진을 대폭 줄였다. 붐비지 않는 쾌적한 분위기에서 검진을 받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를 위해 센터 측은 검진 공간에 호텔식 카펫을 깔고 스낵실·중앙라운지 등을 마련하는 등 ‘우아한 분위기’까지 갖췄다. 가운 입은 채로 남녀 만나지 않게 공간 완전분리 남녀가 섞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 분리’로 해결했다. 다른 병원의 경우 한 개의 검진시설을 남녀가 섞여 이용하기 때문에 ‘속옷에 가운’ 차림으로 직장 상사와 여직원이 만나는 어색한 순간이 연출되기 쉬웠다. 그래서 이 병원은 남녀 공간을 완전히 분리시켰다. 똑같은 건진센터를 2개 만들어 하나는 여자용, 하나는 남자용으로 완전 분리시킨 것이다. 남녀 공간을 완전히 분리함으로써 남녀가 만나는 것은 건강검진을 시작하기 전과 끝난 뒤일 뿐, 중간에 만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이렇게 하자니 공간과 시설이 전보다 2배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시설이 2배가 됐다고 검진 요원도 2배가 된 것은 아니었다. 동일한 검진원이 남자 시설과 여자 시설을 오가면 검진하면 되기 때문에, 시설이 2배로 늘었어도 인원은 1.5배 증가에 그쳤다. 시설을 늘리면서 운용의 묘를 발휘한다는 작전이었다. 마지막으로, 짧은 상담시간을 개선하기 위해 김 센터장은 종전에 의사 한 명이 5분 정도 설명하던 것을 ‘최소한 15분 이상’으로 늘렸다. 그날 찍은 내시경 영상자료 등을 의사가 검진자에게 보여주면서 이런저런 내용을 설명하고, “살을 4kg 빼기로 나와 약속하고 꼭 지켜야 한다”고 당부하는 등 진정한 상담과 대화가 이뤄지도록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상담의사 1명이 3시간의 상담시간 동안 10명 이상을 만나지 못하도록 상한선을 정해놓았다. 김 센터장은 이를 “상담 환자 수를 줄이지 않고는 절대로 상담시간이 길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병원 건진센터의 또 하나 특징은 검진 결과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난 환자에 대해서는 즉시 치료 단계로 돌입시킨다는 것이다. 암이 의심되는 환자는 바로 한 층 위의 여성암센터로 보내져 ‘고속 과정’으로 치료 단계에 돌입하며, 특정 부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면 이대병원 본관의 해당 과로 환자를 바로 보낸다. 이런 신속 진료는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 환자에게 ‘새치기’로 비칠 수도 있다. 몇 개월 또는 몇 시간씩 진료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가 있는데, 단지 목돈을 내고 건강검진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특별대우를 받아가며 바로 당일 진료를 받게 하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기 환자들을 제치고 건강검진 환자가 먼저 진료실에 들어가자 대기 중이던 환자들이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진센터 측은 문제가 발견된 검진 환자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진료를 받도록 하되, ‘새치기’는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접수 뒤 기다리는 시간을 호텔 같은 분위기의 건진센터에서 보내도록 하고, 예약 시간이 되면 해당 과를 찾아가는 식이었다. 기존 대기 환자들에게 이런 사정을 설명하고 새치기를 하지 않으니, 대기 환자들의 민원은 줄어들었다. 건진센터 고객에게 최대한 혜택을 주면서도 진료 흐름에 방해를 주지 않는 방법이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만족시키자” 이런 모든 개혁을 진행하면서 김 센터장이 직원들에게 내건 구호는 ‘단 한 사람이라도 만족시키자’였다. 그 결과, 5% 정도로 높았던 불만율이 남녀 진단 시설을 나눈 직후 점점 낮아지기 시작해 최근에는 1% 선까지 떨어졌다. 이에 대해 김 센터장은 “불만율 0%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향해 한발 한발 전진해가고 있다”고 평했다. 불만율이 줄면서 수익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3월에 새롭게 단장한 건진센터가 문을 연 뒤 매출액이 60%나 늘어났다. 직장 건강검진을 줄여 전체 검진 환자 숫자를 크게 줄였음에도 전체 매출액은 껑충 뛴 것이다. 종전의 ‘다량·박리다매 판매’에서 ‘소량·고품질 판매’로 바꾼 전략이 주효했음을 보여줬다. 같은 기간에 여성 검진자 숫자는 전년 동기 대비 71% 늘었으며, 전체 매출액도 113%나 늘어났다. 여자가 행복하면 남자는 그냥 쫓아간다 요즘 서울시는 ‘여자가 행복해야 나라가 행복하다’는 여행(女幸) 프로젝트 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사실 어느 분야를 봐도 여자가 결정권을 쥐는 비율이 늘고 있다. 이는 남자가 행복하다고 반드시 여자가 행복하지는 않지만, 여자가 행복하면 대개 남자도 행복해진다는 ‘진리’ 때문이다. 선진국의 경우 주택·자동차 등의 구매 결정 때 여자의 발언권이 점점 더 세지고 있으며, 이에 맞춰 업체들은 여성의 마음에 들기 위한 옵션이나 특징을 구현하려 애쓰고 있다. 의료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만족을 느껴야 심리적으로 병원에 더 가까운 여자들이 남자들을 병원으로 끌고 간다. 실제로 이대목동병원에서는 아내가 “딱 1시간이면 모든 검진이 끝난다”고 남편을 속여(?) 건강검진을 받게 했다가, 이 병원 건진센터의 친절 서비스 때문에 이런저런 점검을 받으면서 세 시간 이상이 지나가자 직장에 “한 시간이면 된다”고 말하고 외출한 남편이 부인에게 크게 화를 낸 경우도 있었다고 병원 관계자는 귀띔했다. 이 경우는 물론 ‘여자가 혼난’ 사례이지만, 어쨌든 건강검진 같은 ‘병원 일’은 여자가 결정권을 쥐게 마련이라는 요즘 세태를 잘 보여준다. “의학의 초점은 예방의학·조기진단에 맞춰져야” 김 센터장이 건진센터 개혁에 전념하는 이유는 단지 병원의 수익 증대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그녀는 그간 오랜 병원 생활을 통해 예방의학의 중요성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이를 김 센터장은 이렇게 표현했다. “전체 의료비의 95%를 쓰는 사후치료로 수명을 단 4년 늘리는 반면, 단 5%만 쓰는 예방의학으로는 수명을 11년이나 연장시킨다.” 쉽게 말해, 어떤 사람이 평생 병원비를 1000만 원 쓴다고 할 때, 병의 예방에는 인색하게 50만 원만 쓰지만 그 결과로 수명이 11년 늘어나는 효과를 보는 반면, 일단 병이 발견된 뒤에야 950만 원이란 엄청난 돈을 쓰지만 수명을 늘리는 효과는 단 4년에 불과하다는 통계이다. 김 센터장은 “일단 병이 생긴 뒤에는 돈은 돈대로 쓰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만 건강한 상태로 돌리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면서 “질병의 단초를 미리 찾아내 치료하는 예방의학은 수명 증진 효과가 크고 행복감도 높여준다”고 말했다. 그녀는 “현재의 의료 정책이 사후치료 쪽에 많이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정말로 국민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정부의 초점도 사후치료에서 조기진단 쪽으로 옮겨져야 하며, 느린 속도지만 이런 방향으로 진전이 계속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