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최초, 최초의 기록으로 이어지는 의사의 인생은 어떤 것일까?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박승정 교수(56)가 바로 이렇게 ‘최초로 점철된’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그가 걸어온 ‘최초의 길’을 굵직굵직한 것만 꼽아보자.
최초 1_ 1989년 국내 최초로 심장 승모판협착증 환자에 대한 풍선성형술 성공.
종전이라면 가슴을 여는 몇 시간짜리 대수술을 했을 환자에게 사타구니에 작은 상처만 내고 풍선을 혈관에 집어넣어 심장까지 보낸 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어 혈관의 막힌 부분을 뚫어주는 시술을 성공시켰다. 가슴을 여는 수술을 했다면 환자는 한 달 이상을 병원에서 지내야 했겠지만, 이 환자는 몸에 상처가 거의 없으니 단 며칠 만에 퇴원했다.
최초 2_ 2003년 세계 최고의 의학 학술지 중 하나인 미국의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NEJM)>에 한국인 의사 최초로 논문 게재.
풍선성형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심장 혈관 속에 그물망(스텐트)을 항구적으로 설치해 다시 혈관이 좁아지는 것을 막는 수준까지 발전했는데, 박 교수 팀은 이 그물망에 항암제를 발라놓으면 주변 세포가 자라는 것을 막아 재협착(뚫어놓은 혈관 내부가 다시 들러붙는 현상)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해 채택됐다.
최초 3_ 2008년 3월
박 교수는 이 소식을 듣고 말했다. “이 한 줄을 바꾸는 데 15년이 걸렸다”고. 의학을 모르는 사람에겐 단 한 줄의 차이에 불과하지만, 집념의 사나이 박승정에게, 그리고 세계의 심장 전문의들에겐 ‘의학사를 바꾼 한 줄’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가이드라인 변경에 따라 앞으로 미국의 심장병 관련 교과서에도 ‘박승정의 치료법’이라는 한 줄이 들어가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는 지금 네 번째 ‘최초’를 준비 중이다. 이 역시 지난 2년간의 집념이 만들어낸 결과다. 박 교수 팀은 지난 1월 15일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부터 ‘중재적 판막 치환술’에 대한 임상시험 승인을 받았다. 대표적 심장 수술 중 하나인 ‘심장판막 교환 수술’을 가슴을 열지 않고 역시 스텐트 성형술 같은 간단한 방법으로 치료해주는 혁명적 시술법의 시작이다. 심장판막은 심장에서 피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게 막는 밸브 역할을 한다. 판막에 이상이 생기면 혈액 역류가 생기면서 심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망가진 판막을 고치는 방법은 ▲기계판막이나 돼지판막으로 바꿔 주는 ‘치환술’ ▲판막을 성형해 기능을 되살려주는 ‘성형술’ 두 가지가 현재 경쟁하고 있다. 수술의 구체적 내용엔 차이가 있지만, 둘 다 가슴을 열어젖히고 대수술을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타구니 혈관으로 기구를 넣어 심장에 생긴 문제를 척척 고쳐온, 이 분야의 세계적 리더 박 교수는 생각했다. “판막은 왜 스텐트 식으로 밀어 넣으면 안 돼?”라는 착안이었고, 이를 실험했다. 미리 잘 만들어 놓은 인공 판막을 크기를 줄여, 문제가 생긴 판막 부위까지 사타구니 혈관을 통해 보낸 뒤 망가진 판막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새 판막’을 집어넣어 부풀리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판막이 기능하게 된다는 방식이다. 박 교수 팀이 ‘중재적 판막 치환술’이라 이름붙인 이 치료법이 임상시험을 거치고 학회의 공인을 받게 되면 박 교수의 ‘또 다른 최초’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심장 내·외과 사이 알력 없는 유일한 병원” 그의 ‘최초’들은 모두 가슴을 열어젖히는 대수술을 필요 없게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다. 흔히 ‘칼잡이’로 불리는 외과 의사 중에서도 ‘최고의 칼잡이’들은 심장 수술을 하는 흉부외과·심장외과 의사들이 꼽힌다. 이런 심장 수술 전문의들의 일손을 쉬게 만드는 일을 박 교수는 평생해 왔다. 사정이 이러니 흉부외과 의사에게 박 교수는 ‘적’일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원래 심장내과와 외과 의사들 사이엔 항상 팽팽한 긴장감이 나돌게 마련이다. 심장내과 전문의는 “다른 치료도 가능한데 왜 가슴을 열어젖히나?” 하는 의문을 갖고, 반대로 심장외과 전문의는 “수술하면 완치되는데 왜 약을 먹이면서 시간을 끄나?”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장 내·외과 사이에 이런 알력이 없는, 세계적으로 거의 유일한 병원이 있으니, 바로 박 교수가 몸담고 있는 서울아산병원이다. 박 교수가 “된다”는 성과를 국제적으로 계속 내보이고 있으니, 심장외과 의사들도 굳이 대수술을 고집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병원에서는 심장외과로 온 환자를 심장외과가 심장내과로 보내는 등 완벽한 협진 체제가 갖춰져 있다. 이 병원 관계자는 “이런 시스템을 갖춘 곳은 우리밖에 없을 것”이라고 자랑했다. “세계 최고의 집중력, 운동에서 찾는다” 박승정 교수 “오로지 한 가지만 골라 그것에 미친다” ‘최초, 최초, 최초’를 연거푸 만들어내는 박 교수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에게 ‘세계 최고 성과를 내는 집중력을 어떻게 얻어내느냐’고 물으니, 박 교수는 “운동선수를 보라”고 대답했다. 김연아가 트리플 악셀을 위해 뛰어오르는 순간에 잡생각을 하겠냐는 말이었다. 순간에 집중하고, 그래서 순진한 운동선수 같은 마음을 자신도 가지려 노력한다는 대답이었다. 척 봐도 탄탄한, 운동선수 같은 체격을 가진 박 교수는 스스로 운동을 좋아하고, 운동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1년에 국제적 논문을 20편 이상 발표하고, 수술은 연간 3000례까지도 하는, 그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주일에 두 번은 병원 안 헬스클럽에서 30분 정도씩 운동을 한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스키장을 찾는다. 병원 관계자는 그의 스키 실력에 대해 “프로 선수가 당황할 정도”라고 귀띔했다. 운동 경기가 다른 분야의 경쟁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룰에 따라 경쟁한다’는 점이다. 어느 분야건 룰이 있지만, 운동 경기처럼 룰이 철두철미하게 적용되는 부문도 없다. 농구 경기를 예로 들자면, 우리 팀에 아무리 날고 기는 선수가 많아도 경기장에 내보낼 수 있는 선수의 총 숫자는 ‘한 번에 5명’으로 딱 제한된다. 인구 숫자로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되는 한국이 중국 팀을 맞상대할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이 룰 때문이다. “잘 안될 땐 나 자신도 퇴장시켜야” 스포츠의 이런 룰은 박 교수의 인생철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는 자신이 일을 하는 스타일에 대해 “일단 무엇을 하겠다고 주제가 정해지면 오로지 한 가지, 그것에만 미친다”고 대답했다. 농구팀 감독이 휘하에 아무리 선수가 많아도 그중 “딱 5명”만 골라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하듯,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여러 일 중에서 자신이 집중할 딱 한 가지만 골라 전력투구하되 다른 일은 잊는다는 말이었다. ‘세계적인 집중력’이 발휘되는 이유다. 그는 가슴에 품고 사는 명언을 ‘갖고 싶으면 먼저 버려라’라고 했다. 하나에 집중하자면 나머지를 버려야 한다는 격언이다. 경기장에 한 선수를 새로 투입하고 싶으면 기존에 뛰고 있는 한 선수는 경기장 밖으로 나오도록 해야 하는 스포츠 룰과 마찬가지 원리다. 그는 슬럼프에 빠지거나 일이 제대로 안 되면 스스로를 ‘퇴장’시키기도 한다. “내가 아니어도 세상은 너무나 멀쩡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퇴장시키면 정신이 가벼워지면서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