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실에서 공연 제작자는 참 고단한 직업입니다. 공연 시장이 워낙 작기 때문에 공급자인 제작자가 수요를 창출하면서 일해야 하니까요.” 뮤지컬해븐의 박용호 프로듀서는 공연 제작의 어려움을 이처럼 토로했다. 뮤지컬해븐은 <메노포즈> <쓰릴 미> <스위니 토드> <쉬어 매드니스> <김종욱 찾기> <마이 스케어리 걸> <스프링 어웨이크닝> <웨딩싱어> 등 독창적이면서 파격적인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며 많은 단골 팬을 확보한 제작사다. 뮤지컬해븐의 작품만큼 박 대표의 이력 또한 독특하다. 서울대 성악과 출신으로 삼성그룹에 입사해 사회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우연히 공연 제작사에 들어간 3개월의 짧은 경험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내 취향에 맞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지금의 제작사를 차리게 됐습니다. 절대로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에요.” 뮤지컬해븐은 모험심 강한 제작사 박용호 프로듀서가 다른 성악가 출신 배우처럼 무대에 도전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가 다닐 때 서울대 성악과 분위기는 보수적이고 경직돼 있었어요. 그땐 성악 전공자가 뮤지컬 배우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거든요. 당시 뮤지컬 배우를 한다면 교수님께 벼락을 맞았죠. 지금은 서로 안 하면 바보가 되는 분위기가 됐지만요(웃음).” 성악을 전공해서인지 그는 배우의 노래 실력에 무척 강경한 프로듀서다. 뮤지컬 배우는 첫째도 둘째도 노래라고 강조한다. 연기는 기본이기 때문에 노래 실력이 떨어지면 아무리 연기를 잘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류정한·김무열·조정석·방진의·윤공주 등 뮤지컬해븐의 작품에 오른 배우 가운데 노래 못하는 배우는 없었다. 뮤지컬해븐은 다른 제작사에서는 볼 수 없는 파격적이고 다양한 작품을 올리는 제작사다. 박 프로듀서는 2008년에 무비위크가 선정한 창조적 엔터테이너 50인 안에 꼽힌 바 있다. “뮤지컬해븐만의 색깔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주위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소개한다고 저희를 평가하더군요. 항간에는 제가 사람을 죽이는 공연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정말 억울합니다. 연극과 드라마에선 매일 사람을 죽이는데도 말이죠. 다른 제작사와 비교한다면 즉흥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게 뮤지컬해븐의 색깔이 아닐까 싶어요.” 공연의 다양함과 개성을 강조하는 박용호 프로듀서. 그래서인지 그에겐 라이벌이나 존경하는 프로듀서 역시 없단다. “저에게 멘토가 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라 자칫 건방지게 보일 수도 있겠죠. 만일 내가 추구하는 것을 누군가 앞서서 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그 사람과 경쟁도 하고 배우기도 했을 테니 말이죠.” 서울 이화동에 위치한 뮤지컬해븐의 사무실에는 직원들이 옹기종기 앉아 바쁘게 업무를 보고 있었다. 마침 ‘노네임 씨어터 컴퍼니’(Noname Theatre Company: 뮤지컬해븐의 브랜드로 관극 회원제 비영리극단의 확립을 목표로 한다)의 첫 연극 <뷰티퀸>의 개막을 일주일 앞둔 중요한 시점이었다. 지하 회의실에서 만난 박 대표 또한 미국 일정을 막 소화하고 온 터라 얼굴에 피곤한 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성실하고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특히 그의 말솜씨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기발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지난해에 올린 뮤지컬해븐의 작품 대부분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큰 수익을 올리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작품은 돈을 벌고, 어떤 작품은 많은 돈을 까먹기도 하죠. 성과는 너무 좋은데, 돈이 안 벌리는 경우도 있고요. 이처럼 흥행은 여러 가지예요. 장사도 안 됐고 욕도 많이 먹었지만, 제작비가 적게 들어 손해를 안 봤다면 그것도 흥행인 거죠. 가장 이상적인 건 돈도 벌고 작품도 좋을 때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공연 시장이 작기 때문에 생각처럼 성공 사례가 별로 없어요. 저는 성공을 하건 못 하건, 작품이 잘 나오고 그 작품을 관객에게 인정받으면 만족합니다.”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의 공연을 올리는데도 뮤지컬해븐의 작품들은 모두 예상 밖의 성공을 거뒀습니다. 작품을 선택할 때 어디에 주안점을 두십니까?
“남들이 안 가는 맛집을 찾아 소개할 정도로 저는 한가하지 않습니다. 우연히 제가 가는 길에 좋은 맛집이 있으면 ‘이런 데도 있구나’ 하고 소개하거나, 누구나 아는 맛집에 가서 협상해서 가져오거나 둘 중 하나죠. 다만 제가 고른 작품들이 한국 기준으론 남달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드라마와 소설·영화 같은 다른 장르와 비교하면, 그다지 대단한 작품은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 뮤지컬계가 너무 한쪽으로 쏠렸다는 방증입니다. 뮤지컬을 좋아하고 스스로 심미안이 있다고 느끼는 관객들도 실은 20여 가지 물건만 파는 작은 슈퍼마켓밖에 경험하지 못한 거죠. 반면, 미국엔 1000개의 다양한 물건을 파는 대형 슈퍼마켓이 있는 거죠. 물론 뮤지컬해븐이 공연계의 다양성에 일조했다고 평가해준다면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가장 큰 모험이 된 작품은 무엇인가요?
“공연은 할 때마다 모험이죠. 특히 <스위니 토드>는 모든 면에서 굉장한 교본이 되는 뛰어난 구조의 공연이었어요. 차로 치면 하체가 튼튼한 벤츠라고 할 수 있죠. <쓰릴미> <스프링 어웨이크닝> <필로우 맨> 등은 겉포장이 벤츠 같진 않지만 타봐야 좋은 걸 아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고요. 그런데 제가 이 공연들에 확신을 갖는 건 바로 진정성 때문입니다.”
-프로듀서로서 느낀 최대 고비가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고비는 매년 있습니다. 올해는 연착륙이 목표죠(웃음). 그러나 공연을 할 때마다 강해지고 있다는 건 느낍니다. 올해는 그동안 했던 작품 가운데 안정된 작품을 소개하고 창작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최고로 꼽는 배우가 있나요?
“최고가 누구라고 꼭 집어 말할 순 없지만, 표를 정말 많이 파는, 즉 ‘티켓 파워’가 강한 배우는 조승우 한 명밖에 없습니다. 어떤 작품이든 눈감고 봐줄 수 있는 배우는 조승우뿐이죠.”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요.
“모든 작품에 애착이라기보다는 집착이 있습니다(웃음). 딱 하나를 꼽자면 <마이 스케어리 걸>에 애착이 많이 가기는 합니다. 이 작품은 정말 ‘맨땅에 헤딩’이었거든요. 그런데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싱가포르 투어도 계획돼 있을 정도로 성과가 좋습니다. 오히려 국내보다 외국에서 반응이 더 좋아요. <김종욱 찾기>처럼 좋은 작품으로 정착해가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비영리를 위한 ‘노네임 씨어터 컴퍼니’를 만든 이유는 뭔가요?
“우리나라에서는 ‘돈 벌면 상업, 못 벌면 비영리’라고 생각하는 면이 있어요. 진정한 비영리 단체는 국립 극단이나 지역에 소속된 극단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모든 공연 단체는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입니다. ‘노네임 씨어터 컴퍼니’는 정신이 상업적이지 않은 쪽입니다. 뮤지컬해븐과 노네임 씨어터 컴퍼니가 추구하는 건 주제의식이 명확하고 진정성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 일입니다. 배우와 스태프의 혼연일체로 만들어지는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 혼연일체는 연습 시간에 비례해 나오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노네임 씨어터 컴퍼니’란 이름이 나온 겁니다. 쉽게 말해, 작품을 위해 모이자는 의미입니다. 나중에 회원제가 정착되면 비영리 극단으로서 새로운 모범을 보이고 싶어요. 그 첫 작품이 <뷰티 퀸>입니다.”
-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