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 <제중원(濟衆院)>(SBS TV)이 방영 중이다. 이 드라마에선 의생(醫生)들이 마치 현대의 의대생처럼 코피를 쏟아가며 경쟁적으로 공부하고, 사랑하고, 점수를 받으면서 서양 의술을 베푼다. 대개 평화로운 내용이다. 과연 당시 상황은 그렇게 평화스러웠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난 2월 22일 서울대학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의 김상태 교수가 펴낸 연구서 ‘<제중원 이야기: 새 시대를 향한 열망이 들끓던 곳>(웅진지식하우스 발간)을 보면 다 드러난다. 김 교수의 연구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조선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 고종이 나라 근대화-자주독립의 꿈을 품고 세운 것이 제중원이지만, 결국 나라가 쓰러지면서 제중원도 쓰러졌다’는 것이다. 즉, 제중원은 단순한 병원이 아니라, 조선 근대화의 꿈이 마지막으로 몸부림친 현장이라는 설명이다. 김 교수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제중원에 대한 여러 궁금증을 풀어본다. 1. 제중원은 누가 세웠나? 연세대는 창립 연도를 1885년으로 잡으며, 이는 제중원 설립연도를 기준으로 한다. 이는,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사 호러스 알렌(Horace Allen, 조선 이름 安連)이 이때 고종의 윤허를 받아 제중원을 설립했고, 이 제중원에는 의생 교육 과정이 있었으며, 나중에 제중원 운영을 미국 북장로회가 넘겨받으면서(1894년) 세브란스병원을 창립하고, 세브란스 의전과 연희전문이 합병하면서 연세대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이런 해석은 제중원을 의료·선교사 측면에서만 본 것으로, 연세대 측의 주장에도 물론 일리는 있지만, 제중원은 어디까지나 조선 정부가 세운 정부 병원(government hospital)이며, 단지 운영만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에게 맡겼을 뿐”이라고 해석한다. 제중원에는 ‘온건개화’를 추구한 고종의 꿈과 의지가 숨어 있다는 설명이다. 2. 제중원은 당시 어떤 치료를 했나? 알렌은 제중원을 오픈한 뒤 첫 1년 간의 치료 실적을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인의 질병 상황을 알 수 있다. 가장 많은 환자는 소화기 계통으로 2032명이었으며, 이어 두 번째로는 비뇨기·매독·매독합병증 등의 환자가 1902명이었다. 당시 성병이 크게 문제가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로 발열 환자(말라리아 포함) 1147명, 피부 질환 845명 순이었다. 제중원 개원 첫해부터 활발하게 진료·치료가 이뤄졌음을 알게 하는 기록이다. 3. 조선 사람들은 드라마에서처럼 서양 의술을 무서워했나?
드라마 <제중원>에 보면 조선 사람들이 서양 의술을 두려워 한 것으로 설정돼 있지만, 실정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한의학으로는 살릴 수 없는 민영익을 알렌이 살림으로써 서양 의술에 대한 신뢰가 크게 높아졌으며, 이미 1883년에 일본 공사관 부속병원이 문을 열어 일본인은 물론 조선 사람도 치료해줬다. 일본인들은 서양 의학이 반일감정을 완화시키는 데 훌륭한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용했다. 일본 정부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해 1887년 부산에 문을 연 제생병원의 첫해 진료자 중 40%는 조선인이었다. 물론 이런 와중에도 특히 여성 환자들에 대한 진료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알렌이 고종 황제의 전폭적 신뢰 속에 명성황후를 직접 진찰할 때도 그녀는 몸을 드러내지 않고 명주 천으로 팔을 가려 ‘맥을 짚을 수 있는 1.5cm 크기의 맨살’만 드러냈으며, 구멍을 통해 혀만 보여주는 내외(남녀를 가림)를 했다고 알렌은 기록했다. 이처럼 서양 의술이 시행되면서도 ‘남녀 가림’은 계속 문제가 됐다. 여자 환자가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 것도 문제였지만, 여자 간호사들이 남자 환자 옆에 가려고 하지 않은 것도 큰 문제가 됐다. 그러나 구한말이란 역사의 격동기는 수백 년을 내려온 조선의 남녀 가림을 일순간에 깨는 계기도 됐다. 1907년에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자 대한제국 군인과 일본군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졌으며, 제중원 등 병원에는 부상당한 군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처음에는 간호사들이 남자 옆에 가길 꺼렸으나, 죽어가는 동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한 간호사가 ‘용감하게’ 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대한제국 군인의 부상을 치료하러 나서자, 다른 간호사들도 모두 부상병을 돌보고 나서 애국심을 발휘하면서 적어도 병원에서는 남녀 가림이 완전히 깨지는 계기가 됐다고 김 교수는 전했다. 알렌의 기록을 보면 쇄국정책을 펼친 대원군의 색다른 면모도 드러난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1885년 대원군은 알렌을 자기 집으로 불러 한 시간 동안이나 그의 손을 붙잡고 환담했으며, “장수할 수 있도록 보약을 지어 달라”고까지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대원군은 그 다음날 제중원을 깜짝 방문해 알렌에게 “미국인은 다 좋은 사람들이다”라고 말하는 등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털어놓기도 했다는 기록을 알렌은 남겨놓았다. 외세라면 철저히 배격한 것으로 대원군은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쇄국정책은 어디까지나 정책이었으며, 개인적으로는 고종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서양 의술에 대해 큰 신뢰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4. 드라마에 보면 제중원을 일본인들이 넘겨받으려 하거나 와해시키려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당시 제중원과 일본의 관계는 어땠나? 제중원은 국립병원이었고 운영만 미국계 선교사들이 맡았지만, 당시 서양 의술은 조선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여러 나라가 제중원 운영을 노렸다. 영국 성공회는 1890년 제중원에 의료 선교사를 넣으려 시도했지만, 알렌에 대한 고종의 신임 때문에 “알렌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제중원에 들어가 일할 수 없다”는 회답을 받았다. 일본인 의사가 1891년에 제중원 근무를 희망했고, 1864년에는 일본인 의사들이 제중원 관리를 맡고 있는 주사들에게 돈을 주고 제중원의 진료실을 차지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일본 측은 제중원을 물려받지는 못했다.
5. 1885년에 설립돼 1894년까지 9년 간 운영됐던 제중원의 운영권이 마침내 1894년 미국 북장로회에 완전히 넘어간 이유는 무엇인가? 제중원이 설립·운영된 1885~1894년 사이에는 비교적 큰 사건이 없었다. 그러나 1894년이 되면서 청일전쟁·갑오개혁 등으로 조선은 격동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조선 정부의 재정 상태는 개항 뒤 한때 관세를 징수하여 제중원을 세우고 운영자금을 댈 수 있을 정도로 잠시 풍족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에게 통상권을 보장하면서 조선의 경제권을 일본·청나라 상인이 장악하고 조선 정부에는 관세 수입이 거의 들어오지 않으면서 조선 정부는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 더 이상 병원 운영비를 댈 수 없고, 청일전쟁(1894~5년)에서 승리한 일본이 갑오개혁을 진행하면서 조선을 ‘접수’하는 시점에서 고종은 제중원만큼은 미국 쪽에 맡기고 싶어했다. 어떤 과정을 통해 일본이 제중원 운영을 미국 북장로회에 계속 맡기기로 했는지 그 전모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알렌의 기록을 보면 관련 내용이 일부 언급돼 있다. 그는 1894년에 ‘일본이 제중원을 원하는 바람에 문제가 있었다’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만족할 만한 가교 역할을 내가 하고 있으며’ ‘일본도 나를 고맙게 여기는 한편, 국왕은 내가 조선을 구했다고 계속 말하고 있다’ ‘전적으로 사적인 일이며 비밀’ 등의 기록을 남겨 그가 제중원 운영권과 관련해 고종과 일본 사이에서 뭔가 조정을 했음을 내비쳤다. 이를 김 교수는 “고종은 미국에 뭔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근거로 제중원을 미국 쪽에 맡기길 원했고, 일본도 청일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미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며 “기왕에 고종이 북장로회로 제중원 이관을 승인한 마당에 일본은 이를 뒤엎기보다 묵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