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지성인·중산층이라 해도 자식 문제가 걸리면 밑바닥까지 다 나오는 것 같아요. 훌륭한 교사도 자기 자식을 가르칠 때는 손부터 올라간다잖아요.” 배우 오지혜는 4월 6일 첫 공연을 앞둔 연극 이야기에 목청을 높였다. 연극 <대학살의 신> (God of Carnage)은 오지혜가 <잘 자요 엄마> 이후 5년 만에 선택한 작품이다. 그동안 시골 생활에 푹 빠져 평범한 아내와 엄마로 살았다는 그녀. 연극이 그립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자 “스무 살 때부터 좋은 작품과 좋은 선생님, 좋은 역할을 충분히 다 해서인지 연극엔 미련이 없더라. 연극보다는 시골에서 가족과 사는 게 너무 좋았다”는 답이 돌아온다. 5년 동안 그럭저럭 시골 생활에 만족하던 오지혜는 문득 주위에서 자신을 배우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연극 출연 제의는 몇 차례나 있었지만, 전원 생활과 맞바꿀 만큼 뛰어난 작품이 아니어서 거절했단다. “전교조에 강연 나가고 신문에 칼럼 쓰고, 정치적인 곳에서 제가 자꾸 보이니까 ‘오지혜, 정계에 진출하는 거 아냐?’라는 오해가 있는지 영화 쪽에서 캐스팅도 잘 안 되더라고요. ‘저, 배우입니다’라는 사실을 백 번 말하기보다 무대에 서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이번 연극 출연을 결심하게 됐어요.” <대학살의 신>은 아이들의 싸움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던 양가 부모가 대화를 나누면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점차 과격해지고 유치해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은 코미디로, 2009년 토니 상에서 최우수연극상·여우주연상·연출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다. 오지혜는 극 중 아들의 이를 부러뜨린 가해 아이의 부모를 집으로 초대하여 대화를 시도하는 베로니카 역을 맡았다. 베로니카는 역사에 대한 갈증을 앓는 작가로, 아이들의 싸움을 자세하게 분석하여 해결책을 내려는 야심 찬 생각을 품지만, 알렝-아네트 부부와 이야기하면서 점차 감출 수 없는 유치함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처음엔 번역본을 봤는데, 불편함을 감안하고 보는데도 ‘고급 코미디’라는 사실을 느꼈어요. 희곡을 먼저 본 우리 신랑이 ‘몰카(몰래카메라)를 찍어놓은 것 같다. (베로니카의) 재수 없는 모습도 너랑 똑같다’고 하더군요(웃음).” 이번 연극에서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선수급’ 연극배우 세 명과 무대에 오른다. 박지일·서주희가 가해 아이 페르디낭의 부모로, 오지혜와 김세동이 피해 아이 브루노의 부모로 나와 팽팽한 연기 대결을 펼친다. “너무 쉬는 바람에 감을 잃어버렸어요. 처음엔 저 때문에 연출님을 비롯해 다른 분들이 모두 힘들어했거든요. 저 역시 제가 이렇게 헤맬 줄 몰랐고요. 예전엔 연극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는데, 새삼 힘들다는 사실을 느꼈어요.”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오랜만의 무대에 흥분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작품을 분석하고 역할을 소화하는 오지혜의 탁월한 능력은 여전했다. -<대학살의 신>은 어떤 작품입니까? “프랑스 희곡으로, 토니 상을 받은 힘 때문인지 여러 나라에서 번역돼 공연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먹히는 코미디여서, 한국 정서에 안 맞는 부분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전 세계에서 번역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한민국·프랑스·아랍이건 어디건, 내 자식이 걸린 문제에 부모 마음은 똑같지 않나 싶어요. 이 연극은 아이들 싸움을 우아하게 해결해보자고 모인 지성인 부부가 대화하다 속물근성과 쓴 물·똥물들이 다 올라와서 관객으로 하여금 ‘되게 한심하다’는 감정과 ‘나도 저렇지 않나?’ 하는 쾌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코미디입니다.” -남편(이영은 감독)은 오지혜 씨의 어떤 면을 베로니카와 닮았다고 하나요? “맞는 말을 하면서도 분위기를 보지 않고 이야기하는 점이라고 하더군요. 원칙주의자라서 피곤하기도 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남까지 조율하려 드는 성격도 닮았고요.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유해졌지만, 20대 때는 제가 봐도 베로니카 같았어요. 충고를 해도 싸가지 없게 말해서 적도 많았고요. 이 작품을 보면서 반성을 많이 했어요.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니, 한심하고 웃기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에게 정이 가요. 사람의 힘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점 때문이죠.” -실제로 자녀가 다른 아이와 다퉈 곤경에 처한 적이 있습니까? “여자아이인데다 아직은 어려서 그런 적은 없는데요, 제 아이가 브루노 또래이기 때문에 상상은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민망하고 어색할 테지만 지혜롭게 해결해야겠죠? 그런데 때린 입장일 때가 맞은 입장일 때보다 천 배로 더 힘들 것 같아요. 한창 강연을 많이 다닐 때는 ‘딸에게 성폭행당하지 않도록 조심시키는 일보다 아들이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부모가 ‘내 자식은 그럴 리 없다’고 하지만, 다 그럴 수 있거든요. 저 역시 제 아이를 사랑하지만, 모르는 일입니다.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자라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성폭행 가해자의 90%가 아는 오빠와 남자친구이고, 집에서는 모두 착하고 성실한 남자라죠? 그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부산 여중생 성폭행 살인 사건’ 때문에 사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딸을 가진 부모로서 걱정이 많이 되시겠어요. “그건 아들도 마찬가지죠. 그렇지만 제 아이는 걱정을 안 합니다. 제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전교생이 100명을 조금 넘는데요, 학생은 부모가 보는 데서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 부모가 데려올 때까지 학교에서 밥 주고 놀고 보살핌을 받거든요. 때문에 보호자 눈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어서 안심이 됩니다.”
-논쟁이 과격해지면서 몸싸움까지 불사하는 연극인데요, 체력적으로 힘든 점은 없나요? “물건을 집어던지긴 하지만, 직접 때리진 않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진짜로 때리는 것처럼은 보일 거예요. 몸을 움직이는 일보다 소리를 지르는 쪽이 더 힘들어요. 감정으로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많으니까요.” -서주희 씨(아네트 역)와는 몇 번째 호흡이죠? “처음입니다. 언니가 중대 연극영화과 85학번이고 제가 87학번이어서 대학생 때부터 줄곧 친하게 지냈는데, 이상하게도 작품은 한 번도 함께 못 했어요. 이번 작품을 같이 하게 돼 서로 반가웠습니다. ‘드디어 우리가 만나는구나’라고요.” -엄마들의 기 싸움이 볼거리일 것 같은데요, 서주희 씨와의 기 싸움도 있나요? “여자들뿐 아니라 남자들끼리도 서로 기 싸움을 합니다. 그렇지만 연극이 살기 위해서는 서로 조율해야 하기 때문에 누구 하나가 튀어선 안 돼요. 우리는 모두 선수이기 때문에 작품이 재미있게 보여야 모두 산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아요.” -기 싸움 말고 또 다른 재미 요소라면? “살짝 성인 연극의 요소가 있습니다. 초반 10분부터 두 부부의 관계가 아슬아슬해지거든요. 싸우면서 의외로 정이 들어 친해지고요. 연기하면서 ‘등장인물들 귀엽지 않아?’라고 얘기한 적도 있어요. 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힘인 것 같아요. 어떤 이야기든 주장 하나로만 가면 재미가 없는데, 극중 인물들이 체면을 지키려다가 생활·인생·자식 등 엉뚱한 이야기를 마구 하면서 재미있고 귀여워지죠.” -이 연극은 폭력적이고 유치한 근성을 다룬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지혜 씨가 가장 폭력적이고 유치할 때는 언제인가요? “아무래도 부부 싸움을 할 때 아닐까요? 폭력은 안 쓰지만 유치해지죠. 말꼬리 붙잡고 늘어지기도 하고, 억지를 부리는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고요. 그런데 부부 싸움의 금기는 절대로 건드려선 안돼요. 처음엔 화가 나서 선을 넘을 때도 있었는데요, 결혼 11년차가 되니까 그 금이 안 넘어지더군요.” -베로니카와 오지혜 씨는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점에서도 닮은 것 같습니다. ‘의식 있는 배우’란 호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모든 배우와 예술가는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해요. 세상을 모르면서 어떻게 주제를 불러내고 해석하는 역할을 하겠어요. 이건 시사 앵커만 하는 역할이 아니거든요. 정치 뉴스는 아니지만, 연극 역시 토론의 장이 돼야 하기 때문에 뉴스에도 관심이 있어야 하고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력과 상관없이 의무감으로 가져야 하는 기본입니다. 가치관이 다를 수 있지만, 저는 순수예술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순수예술을 어떻게 하겠어요? 오히려 (세상일에) 너무 관심 없이 사는 배우들이 이상한 거죠.” -소통의 부재를 꼬집는 연극인데요, 오지혜 씨도 소통의 부재를 느낄 때가 있나요? “이 연극의 주제가 특별히 ‘소통의 부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모든 작품이 소통의 부재를 다루니까요. 자기가 지성인이라고 믿는 중산층 지식인들의 허세를 풍자한 작품입니다. 똑똑한 척하고, 인류의 도덕과 윤리를 책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 이빨 하나 나간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죠. 제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주제는 ‘너나 잘해라’입니다.” -연극에 복귀한 딸을 보면서 부모님인 배우 오현경·윤소정 씨도 뿌듯해하시던가요? “서로 뿌듯하죠. 물론 지금은 신랑과 아이 얼굴을 일주일에 한 번밖에 못 보지만, 퇴근해서 집에 가면 부모님이 계시고 연기에 대한 코치, 피와 살이 되는 심리적인 조언을 다 들을 수 있다는 큰 행운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부친께서 <평행이론>에서 보여준 연기가 화제가 됐습니다. 부친께서는 건강하신가요? “그럼요. 70대 중반인데도, 얼마 전엔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쩌렁쩌렁한 발성을 내뿜었고, 지금도 새벽 1시까지 후배들과 술을 마실 정도로 무척 건강하셔요.” -<대학살의 신>의 관람 포인트는 뭔가요? “인생과 인간의 장단점을 극대화해서 1시간 반 안에 추려 넣는 것이 극·드라마인데요, 연극은 실시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인데다, 8시부터 9시 반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고품격에서 ‘더러운’ 것으로 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답니다.” -끝으로, 독자와 예비관객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극장에 오셔서 당신을 확인하세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