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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시선]권력에 가까워진 종교는 힘 잃는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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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05호 편집팀⁄ 2011.01.17 14:20:49

글·윤영상 ysangyn@naver.com 최근 모 교회에서 목사님들 사이에 폭행 사건이 빚어져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자세한 내막이야 외부 사람인 우리가 다 알 수 없겠지만,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소식에 의하면 우발적 사건이라기보다는 목사님들 간 오랜 내부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해야할 종교인들이 우습고 창피한 일을 당한 것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더군다나 이러한 문제가 비단 특정 종교만의 문제도 아닌가보다. 종종 주지 임명을 둘러싼 스님들 간의 몸싸움이 벌어졌다던가 스님들 간 파벌 싸움이 일어났다는 소식들이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기도 하니 말이다. 게다가 뉴스를 좀 더 찬찬히 살펴보다보면, 종교인들의 문제가 비단, 교회나 절 안에서만 일어나는 내부 정치적 다툼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닌 듯하다. 더 넓게는 4대강 문제, 남북문제 등 세속의 정치 현안에 대해서도 종교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툼을 일으키기도 하니 말이다. 지난 12월에 ‘기독교윤리 실천운동’이라는 단체가 종교의 사회적 신뢰도를 조사했단다. 그런데 그 결과를 살펴보면 참 개탄할 노릇이다.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가 17.6%로 하위를 차지한 데 이어 다른 종교에 대한 신뢰도도 모두 전반적으로 매우 낮게 나타났고, 무종교자(47.0%) 중 67.0%는 향후에도 종교를 가질 생각이 없다고 응답했다니 말이다. 겉으로만 봐서는 신앙이란 것이 세상의 희망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동안 많은 종교 단체들이 그들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또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러한 노력과는 관계없이, 아니 오히려 종교가 세속적 권력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종교의 영향력은 점점 감소했으니 말이다. 종교가 무엇인가. 종교는 불평등과 가난, 다툼 등 세속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또한 더 본질적으로는 인간의 죄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속의 차원을 벗어난 그 이상의 절대적 진리와 가치를 깨닫는 사상 혹은 활동이 아닌가. 그러니 그러한 종교가 세속의 권력에 집착했을 때 오히려 그 본질의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산 속에 갇힌 수도자처럼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물어야 하는가. 아니, 부패한 인간과 타락한 세상이 본래의 가치를 되찾도록 하는 것이 신앙의 역할인데, 세속화가 무서워 종교가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신앙적 직무유기일 것이다. 각개 종교인은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지만 교회-절-성당을 중심으로 정치적 성향이 모이면 그건 친목단체지 신앙 아니다 실제로 저명한 신학자이자 네덜란드의 수상이기도 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신앙인들이 신학 이외의 세속 학문을 멀리하고, 사회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경향을 통렬히 비판하며, 신앙의 ‘사회성’을 부각시키고 신앙인들이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작금의 종교 세속화 문제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한 예로, 백주년기념교회의 이재철 목사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환경이나 평화 등 세속 문제에 대한 교회의 태도와 역할에 대해 ‘교회의 역할’과 ‘정부의 역할’을 지혜롭게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모든 종교를 통틀어 종교는 정부의 역할을 대신해서도 안 되고, 정부가 종교의 역할을 대신해서도 안 되며 각각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불교신자든 그리스도인이든, 개개인은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진전된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교인들이 교회, 절, 혹은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을 때는 개인의 정치적 의사를 넘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만을 탐구하고 설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교회에는 4대강을 찬성하는 사람만 있고, 어떤 절에는 반대하는 사람만 있다면 그것은 친목단체일망정 신앙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마이클 호튼의 지적과도 유사하다. 즉 종교인은 동시에 두 나라의 시민, 즉, ‘교회시민’과 ‘국가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교회, 즉 종교로 모였을 때는 정치적 견해가 아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연구하고 선포하는 데에 힘써야 하며, 국가시민으로서 세상 가운데 모였을 때는 자신이 속한 영역(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가정 등)에서, 앞서 교회에서 설교되었던 진리를 토대로 사회 정의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호튼의 주장이다. 즉, 종교인이 종교로 모였을 때의 역할과 세인으로서 모였을 때의 역할을 구별해,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유지하되 종교의 세속화는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가운데서 종교를 가진 개개인이 사회 현안에 대한 항의 집회에 참여하는 등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교회, 즉, 종교라는 이름으로 모였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신학적 기여’ 즉, ‘진리의 토대’를 마련하는 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영역을 혼동하지 않고 각각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두 가지 모양의 시민으로서의 역할 모두를 적극적이고 충실하게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들이 이 두 역할을 혼동하여 종교를 통해 정치적, 세속적 권력을 잡으려 했을 때, 다시 말해 세속주의자들에게 빼앗겼던 권력을 종교가 다시 빼앗겠다는 식의 생각을 했을 때, 신앙의 세속화가 오히려 종교의 근본적인 능력과 영향력을 잃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나 절 내부의 구조적 문제로까지 번지게 된다. 반대로, 종교인들이 세상으로 흩어졌지만 지성과 사회에 무관심한 채 사회 정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면, 종교가 짠 맛을 잃은 소금처럼 돼 그 본연의 영향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뉴스를 보고 주위를 살펴보면 세상은 점점 혼탁해지고 개개인들은 점점 더 많은 고통과 좌절 가운데서 허우적대고 있는 듯해 참으로 안타깝다. 인간의 이기심을 방치하거나 효율성 중심의 사회적 제도만을 의지했을 때는, 불평등이나 가난 같은 세상의 문제들이 더욱 심화될 뿐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초월적 가치를 가진 신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 종교가 세속화되고 타락했다고 하지만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권력을 등진 종교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 하고 있어 세상이 시끌벅적해질수록 종교인들의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그러나 종교인들 스스로, 종교의 세속화만은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종교인들은 진리를 열심히 탐구해 진리의 토대 위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 힘은 세속의 권력이 가진 힘보다 더욱 크다. 성경은 세속화돼 세상과 혼합된 옛 이스라엘의 종교인들을 경계하면서, 그들의 신앙이 백발노인처럼 무기력하다고 신랄하게 경고했다(호7:8~9). 승가의 속담 중에도 “중 벼슬이 닭 벼슬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교훈으로 세속적 가치와 권력에서 탈피했던 성철 스님이 있다. 더구나 세속적 소유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법정 스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귀하고 소중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던가. 물론, 모든 종교인들이 세속화됐다고 믿지는 않는다. 아무리 교회 안에서 폭력사태가 빚어지고, 종교가 타락했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하더라도, 필자가 여러 봉사활동 현장이나 구호활동 현장 등에 나가 보거나, 세상의 어두운 그늘 가운데로 깊이 들어가 봤을 때, 어둠 가운데서 한 줄기 빛이 되며, 썩어가는 세상 가운데서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 역할을 묵묵히 해내며 열심히 피땀으로 헌신하고 있는 이들은 바로 종교인들이었다. 그러한 참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야말로 세속의 권력을 쫓지 않았기에 이름도 없이 그늘 가운데서 봉사하며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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