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성 문화예술 AG 기획팀장 그렁그렁한 눈빛의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고양이. 때론 고혹적인 눈초리를 보이기도 하고 어느 땐가는 우수에 찬 눈빛으로 말을 걸어온다. 작가 성유진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들을 정리하면 이런 게 아니었나 싶다. 큰 화면의 작품에 커다란 인간과 흡사하지만 다분히 많은 고양이적 요소를 지닌 이 녀석들이 화면을 압도한다. 몇 년 전 작가노트엔 이런 글귀가 있다. “고양이가 점점 나를 닮아간다. 아니 내가 고양이를 닮아가는 것일까. 알 수 없는 고양이 맘속에 내 마음도 있는 것일까. 그 답을 찾으려 내 마음에 고양이를 넣는다.” 이러한 작가의 노트가 아니더라고 필시 작가가 작품에 등장하는 고양이와 본인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작품을 통해 확연히 알 수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들은 고양이의 본능적인 자태나 모습이기보다는 인간의 몸에 고양이의 털과 귀를 가진 반인반묘의 모습이라고 하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이 반인반묘의 녀석은 특히나 일본 애니메이션에라도 등장할 듯, 얼굴의 3분의 1이 눈이어서 마치 ‘눈으로 말해요’라는 것처럼 여겨진다. 커다란 머리에 눈과 귀를 덮은 털의 표현에서 작가는 주 제재로 사용하는 콘테를 이용해 갈퀴들과 몸 전체를 덥고 있는 털을 표현하고 있다. 부드러운 털의 표현과 거친 듯 삐죽거리는 털들이 공존한다. 작품(이미지 1)에서 작가는 두 손을 모아 음료수를 마시는 뿔난 고양이를 표현했다. 화면 하단 중앙에 음료수 컵을 쥔 손가락을 보면 손가락 마디마디에 굳은살이 벌겋게 보인다. 이런 손으로 얌전히 음료수를 들이켜다 말고 한숨을 돌리는 냥 입술을 벌리고 있다. 손가락에 벌겋게 표현된 굳은 생채기를 보고, 이 반인반묘의 머리에 또아 올라간 선인장 같은 뿔(머리 정수리 부분은 선인장을 연상시키지만 그 끄트머리를 찾아가면 긴 머리타래를 여럿 땋아 놓은 형상이다)을 본다. 머리 타래인 듯, 또는 선인장의 지류인 듯 보이는 가지가지의 끝 역시 마치 손가락들처럼 생채기를 갖고 있다. “고양이가 나를 닮아간다. 아니 내가 고양이를 닮아가는 것일까. 고양이 맘속에 내 마음도 있는 것일까. 내 마음에 고양이를 넣는다.” 그리고 다시금 눈이 가는 곳은 바로 이 녀석의 눈망울이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눈망울 속에서 때로는 슬픔과 아픔이, 어떤 때는 생기를 잃어 가는 공허함을 느끼게 만드는 눈동자다. 그 안에 그렁거리며 맺혀진 눈물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마음을 고양이에 투영해 보여 준다. 자신의 감정을 대입시키는 역할을 눈물 고인 눈망울로 이어 나가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작가는 콘테의 묵직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콘테의 마력을 작품에 부어 넣고 있다. 이는 마치 작가 성유진이 다양한 동물군들 속에서 구태여 고양이를 선택한 것과 동일한 행보를 거친 것이다. 고양이 이미지 이외의 바탕은 자연스럽게 엷은 색조로 마감됐다. 다른 작품(이미지 2)의 경우는 작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형태로, 마치 ‘샴쌍둥이 고양이’를 보는 듯하다. 신체의 일부가 붙어 각자의 다른 객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일 수밖에 없는 두 마리의 고양이를 표현했다. 앞 ‘이미지 1’이 그렁거리는 고양이의 눈망울로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작품이라면, 이 작품 속의 고양이는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게다가 한 눈동자는 두 마리의 공동 소유다. 같으면서도 다른 이 녀석들의 벌려진 입이나 콧방울, 살며시 닿아 있는 어깨와 팔, 그리고 손의 동작들은 새근거리며 잠자는 아기의 모습과 흡사하다. 순진무구하고 소중한, 힘없는 개체로서 눈을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감고 있는 이 작품의 이미지에는 앞의 작품들보다 더욱 마음을 지그시 누르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고양이의 눈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의 창을 닫음으로써 더욱더 관람자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들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관람자는 더욱더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된다. 신체의 일부를 서로 공유하는 작품으로 ‘이미지 3’을 본다.
이미지 2에서 반묘반인이 얼굴의 일부인 눈을 공유했다면, 이번에는 허리 아래의 하체를 서로 공유한다. 화면의 위쪽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만 본다면 이 녀석들은 사실 고양이라기보다는 사슴과 동물로 추정되는 신체 구조를 갖고 있다. 두 마리 고양이의 머리 뿔을 보면 더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은 양쪽 귀 위로 뿔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콘테의 선과 거칠고 강하며 묵직한 느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 동물이 앉아 있는 곳은 어딘가 턱이 존재하는 곳이고 뒷배경도 가을 색을 닮은 색조로 구성되어 있다. 성유진의 일련의 이러한 작업들은 고양이를 소재로 작가의 표현처럼 작가와 고양이를 동일시하며 작품에 투영해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관람자를 응시하는 눈망울을 잊지 않는다. 작가가 제재로 선택한 콘테라는 매체도 작가의 이러한 작업 경향과 맥을 같이 한다. 물감과 달리 콘테는 작가의 감정을 더 화면에 잘 와 닿도록 표현하며, 강함과 부드러움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 그런 점들을 종합해 보면 작가에게는 꾸준히 묻고 눈길을 보내는 관람자가 함께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것인 아닌가 싶다. 이런 작품을 선보이던 작가가 최근 개인전은 ‘고양이 작가’로 알려진 그가 어떤 방향으로 작품 세계를 변화를 줬는지, 어떤 형태로 작가의 고민을 보일지에 관심을 모았다. 보는 사람이 “이 작가 바뀔 때가 됐는데…”라고 느낀다면, 작가 본인은 얼마나 바꾸고 싶을까. 드물게 이런 과제를 완성하는 작가가 있어 반갑다. 젊은 작가의 작품들을 눈여겨보면서 몇 년을 쫓아가다 보면 사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변화를 꾀하는 데 힘들어 하는 경우를 본다. 필자처럼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몇 년 뒤 ‘변화가 필요한 시기구나’라고 느꼈다면 필시 작가는 더 일찌감치 이런 점을 자각하고 더 많은 고민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고민의 흔적들이 잘 풀어지는 경우보다 아쉬운 경우를 많이 보는 게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성유진이 최근 개인전에서 선보인 일련의 작품들은 작가의 변화를 잘 보여줬다. 작가의 주된 소재인 고양이와 콘테는 여전하지만 이전에 선보이지 않았던 도상적인 요소들을 그림에 넣어, 작품이 전달하는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색감에서도 작가가 이전에 선보였던 작품의 색조에서 잘 이어지는 색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잃지 않은 것은 고양이의 작가화라고 할까. 화면에 등장하는 고양이들은 여전히 작가처럼 보이고 단지 형상을 반인반묘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더욱 다양해진 색감 속에서 일부 아직은 정리가 필요한 듯 보이는 거친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커다란 이미지 변화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렇듯 본인이 선보인 작품의 세계를 또 다른 모양으로 잘 담아내는 작가들을 볼 때 필자는 잔잔한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작가의 다음 작품들에 대해 다시금 기대를 갖고 기다리게 된다. 여담으로 덧붙이자면 작가는 샴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색깔의 변화를 온몸에 지닌 녀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