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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때가 묻은 연기, 어때요?”

극단 ‘작은신화’ 창단 25주년 기념 연극 ‘돐날’의 주인공 길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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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24호 이우인⁄ 2011.05.31 09:40:36

“와우! ‘돐날’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어요. 입소문만으로도 관객이 몰렸으니까요. 특히 연극을 한 번도 안 봤던 남자와 직장인이 ‘돐날’을 정말 많이 찾았죠.” 배우 길해연(47)은 2001년 동숭아트센터에서 초연된 연극 ‘돐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가슴을 활짝 폈다. ‘돐날’은 초연 당시 제10회 대산문학상 희곡부문 수상, 2001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정 BEST3, 2002 동아연극상 작품상·연출상(최용훈)·연기상(홍성경) 수상 등의 성과를 일궈낸 수작이다. 이처럼 평단과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돐날’이 6월 3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8년 만에 극단 작은신화 창단 25주년 기념으로 재공연된다. 작은신화의 창단 멤버인 길해연은 초연에 이어 경주 역으로 이번 무대에 선다. 8년이란 긴 세월이 흐르고 다시 대하는 경주가 낯간지러워서 출연을 망설였다는 그녀는 쑥스러운 미소를 보인다. “8년 전에 했던 경주를 이 나이에 어떻게 하라고? 했죠(웃음). 1, 2막(경주는 3막에 등장)에서 극 중 인물들이 경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요. 경주는 아주 멋있고 성공한 여자라고요. 이런 대사 때문에 지금의 제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하기가 두려운 거예요. 모두 깜짝 놀라면 어쩌나 하고요(웃음).” “‘돐날’ 보면 소주 한 잔 생각나” ‘돐날’은 새 생명의 탄생과 미래를 축복하는 돌잔치를 배경으로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상처를 도려내고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돐날’의 김명화 작가는 “30대 중반, 그 나이는 보편적으로 인생에서의 꿈을 상실한 나이이며, 동시에 제도적인 안정과 그에 필요한 적당한 속물성에도 완전히 정착하지 못한 어정쩡한 나이다”고 집필의도에서 밝히고 있다. 길해연은 “‘돐날’의 가장 큰 매력은 자기 모습을 무대에서 확인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며 “극 중 인물도, 관객도 현실에 부딪히기 전에는 사회에 대한 정의와 진리를 고민하던 사람들이었을 거다. ‘돐날’을 보면 소주 한 잔이 생각난다는 말이 정답”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소주 한 잔이란 무대에서 배우들이 표현하는 삶과 꿈에 대한 미련이나 아픔을 관객이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떠올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초연 때 배우들이 직접 전을 부치며 잔치 음식을 만들고 갈비찜, 잡채, 나물 등 진짜 음식을 무대에 등장시켜 관객의 시각, 후각, 청각을 모두 자극해서가 아닐까? 상상은 침을 꿀꺽 삼키게 하지만 실제로 사방이 막힌 무대에서 음식 냄새는 배우·관객에게 고문이나 다름없다. “직접 전을 부치긴 하지만, 무대 위에 있는 전의 반은 부패하지 않도록 라커를 뿌리거든요. 그런데 극 중 미선 배우가 헷갈려서 속이 다 썩은 전을 먹은 적이 있어요. 저는 잡채를 먹는데 잡채가 쉬었더라고요. 뱉을 수 없는 처지여서 맛있는 연기를 하면서 먹었죠. 먹고 나선 정말 혼났어요(웃음). 밀가루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끈적대는 소품용 피 때문에 낮 공연이 있는 날은 공연이 끝나고 씻기에 바빴죠.” 배우의 건강을 사리지 않는 열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돐날’은 ‘거 참, 무대 한 번 먹음직스럽네’ ‘무대에서 전을 부치는 통에 침이 넘어가는 것이 탈이라면 탈이랄까’ 등의 리뷰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8년 지났지만 ‘돐날’이 추구하는 주제는 변함없어” ‘돐날’에 대해 의아한 점은 왜 그토록 즐거운 공연을 8년이 지나서야 공연하느냐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길해연은 “극단 작은신화는 재공연을 잘 안 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며 “그런데 이번엔 극단 작은신화의 25주년 기념 공연이고, 8년 전에 못 보거나, 봤지만 재공연을 기다리는 관객을 위해 공연을 결정했다”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또 8년 전에 본 관객에게 그때의 감흥을 다시 주기 위해 이번 공연이 초연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와 “당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확해서 이번 공연을 굳이 초연 때와 다르게 만들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해설도 덧붙인다. 길해연을 비롯해 연출(최용훈), 작가(김명화), 배우(홍성경, 서현철 등)도 초연 때와 같다. 물론 여기에 김왕근, 김은석, 황정민, 정승길 등 새 얼굴이 색다른 조미료를 첨가하기 때문에 과거와 다른 ‘돐날’에도 관심이 쏠린다. 8년 전과 지금 세월의 변화를 느끼느냐는 질문에 길해연은 “솔직히 나를 볼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2막에서 남자 배우들을 보니 더 원숙해지고 노련해지는 등 그들의 성장이 느껴졌다”고 혀를 내두른다. 특히 몹쓸 역할인 성기 역의 서현철에 대해서는 “초연 때는 악역을 연기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자연스럽더라. 진짜 못 되졌다”고 말했다. 이어 “연극배우들은 사회인과 다르게 인생의 때가 덜 묻어서 순수한 편인데 서현철을 보면서는 세월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8년 전 작품을 8년 세월의 때가 묻은 배우와 스태프가 만들지만 ‘돐날’이 추구하는 주제는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돐날’은 누가 봐도 공감할 거라고 자신해요. 어린 친구에게는 미래의 통과 시점을, 현재 그 모습을 사는 사람에게는 과거와 미래를, 거쳐 온 사람에게는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작품입니다. ‘돐날’은 무언가를 심각하게 다루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사는 이야기, 마음속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때문에 모든 세대가 편하게 볼 수 있을 거예요.” “배우 되면서 글쓰기에 대한 미련 가볍게 놔” ‘돐날’은 무엇을 해도 어정쩡한 나이인 30대 중반에 포커스를 맞춰 그려진 작품이다. 초연 때의 길해연은 작품 설정에 맞게 30대였지만 이제는 40대 후반이다. 40대 배우가 30대의 고민을 진정성 있게 표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길해연은 “정서는 30대나 40대나 다 같다”며 “옛날에는 내가 마흔이 되면 뭔가 대단한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안 그렇더라. 70대인 (연극계) 선생님들도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로 일축했다. 오히려 30대 때에는 보지 못했지만 40대가 되어서야 깨달은 부분은 있다. “경주가 마지막 장면에서 칼을 맞고 쓰러진 지호(정승길 분)를 안고 ‘괜찮아 다 되돌려줄게’라는 대사를 하는데요, 8년 전에는 지호를 억지로 껴안는 느낌이 있었어요. 지호를 온전히 안아주기에는 길해연의 날이 날카롭게 서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 대사를 받아들이기가 편해졌어요. 지호에게 진정한 위로를 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돐날’의 마지막 장면은 과거 큰 화제가 됐다. 길해연의 파격적인 노출 때문이다. 경주가 지호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는 장면인데, 40대 후반의 여배우가 표현하기에는 격한 장면이 아닐까? 그런데 이 장면이 길해연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극본에는 경주가 지호를 그냥 안아주는 데서 끝나거든요. 사실 연기하는 입장에서 노출은 어려운 선택이지만 경주라는 인물에겐 그렇게 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안아주고 극을 마무리하기에는 ‘자궁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지호의 대사가 너무 강했거든요(웃음).” ‘돐날’은 꿈을 이루지 못한 30대의 정체성 혼란을 그린다. 길해연도 30대 때 배우로서 힘든 시기를 겪고 40대에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자신의 30대를 ‘여전사 같았다’는 말로 표현하는 길해연은 “그때는 눈에 독이 올라서 살았던 것 같다. 어떤 친구는 나를 보고 ‘눈에서 불이 나오는 것 같다’고도 했다. 아이 문제도 걸리고, 연기 활동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집에 대해서도 늘 투쟁했다. 그런데 40대가 되면서부터는 모든 고민을 놓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도 내가 차분해지고 넉넉해졌다”면서 가슴 속 숨을 한 번에 몰아 내쉬었다. 투쟁에서 승리하기까지 힘들었지만 배우 일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길해연. 그녀는 약 25년 전 명문대(동덕여대 국문과) 학생이 걷는 탄탄대로를 걷어차고 ‘배고픈’ 연기자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모든 여배우가 느끼는 고충을 감내해야 했다. 국문과에 들어간 이유도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는 그녀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글쓰기에 대한 미련도 배우가 되면서 가볍게 놨다고 한다. 길해연은 “나는 무엇이든 선택한 다음에는 후회하지 않는다”며 “처음에 출연을 고민했던 ‘돐날’ 재공연도 결정한 뒤로는 고민한 적 없다”고 자랑했다. “‘바다의 연꽃’처럼 후회없는 삶을 살고 싶다” 길해연의 후회하지 않는 성격은 어쩌면 이름 때문일지도 모른다. 원래 그녀의 이름 해연은 ‘바다(海)에서 뻗어나가라’라는 의미의 ‘연(延)’이었는데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연꽃(蓮)이 됐다고 한다. 같은 발음이지만 뜻은 상반된다. 연꽃은 바다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엄마는 제 이름 한자를 고쳐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셨지만 저는 ‘내 인생이 이름 때문이라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살아보자’하고 웃어 넘겼죠.” 실제로 길해연은 인생을 누구보다 멋지게 살고 있다. 배우만큼 멋진 일이 어디 있냐면서 배우가 돼서 좋은 점을 몇 가지 읊었다. 최근에는 어머니에게 밀린 효도도 했다. 길해연의 모친 김복희 씨는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다. 한 명의 예술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희생이 따른다는 의미가 담긴 상이다. 올해는 7명이 받았는데, 그 중 연극인 어머니 중에는 길해연의 모친이 유일하다. 어머니에게 어떤 뒷바라지를 받았기에 상까지 드렸을까 싶어서 물었더니 길해연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뒷바라지요? 엄마는 제가 연극배우 하는 걸 정말 많이 반대한 분이에요. 본인도 장한 어머니상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던데요? 그래도 이와 관련해서 인터뷰할 때 처음엔 ‘나 (내 딸한테) 해준 거 없어요’하던 분이 나중엔 ‘아이 내가 키워줬다’ ‘김치도 내가 담가줬다’ ‘살림도 내가 다 했다’고 자찬을 하시대요(웃음). 저도 부모님께 걱정시켰던 연극으로 영광을 안겨드릴 수 있게 돼서 행복합니다. 후배들도 저더러 부럽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금은 초심으로 돌아가 작가와 영화 일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는 길해연. 글을 쓴 경력은 오래됐다. 어린이를 위한 연극 대본과 동화를 써온 그녀는 춘천인형극 대본 공모에도 당선될 만큼 글 실력을 인정받았다. 한뼘도서관 시리즈의 ‘꽥꽥오리 날던 날’과 ‘어린이를 위한 집중’ 등을 펴낸 중견급 작가이기도 하다. 현재도 집필 중인 책 때문에 정신이 없다는 그녀의 ‘바쁨’이 부러워진다. 작은 역할이지만 영화에도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 영화 출연작이 연기 인생 25년 동안 축적해온 연극 출연작보다 많게 느껴질 정도로 많다. 영화배우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냐는 질문에 길해연은 귀를 쫑긋 세웠다. “영화에 출연하려고 노력한 적은 없지만 ‘마파도’에서 인연이 닿은 사람들의 연락을 응하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많아졌더라고요. 영화 쪽 분들은 마치 저를 ‘동지’로 느끼는 것 같아요. 너무 고마운 일이죠. 저는 연극이나 영화나 연기는 똑같다고 생각해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일하는 스태프와 배우의 희생도 마찬가지고요. 앞으로도 영화 신입생으로서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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