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재벌계 미술관인데, 왜 이렇게 다르나? 세계 10대 미술관 중 하나이면서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관광명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게티미술관(J. Paul Getty Museum)이 있다. 태평양과 LA시내를 굽어보는 언덕 위에 자리잡은 이 미술관은 재벌계 미술관답게 입장료가 따로 없고 주차비만 15달러를 받는다. 연간 방문객이 130만 명에 달한다니 하루 3600명 정도가 쉬지 않고 찾는 미술관이다. 게티미술관을 방문하면서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은 단순히 이들의 소장품(200만 점)이 많고 시설이 화려하다는 점만이 아니다.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운영해 어린 학생과 미술 관련 지망생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 또 학술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미술 전문가를 양성해 전 세계로 내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 복도에서 만나는 선생님과 학생 그룹의 또랑또랑한 눈초리들은 ‘재벌의 돈이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를 현장에서 보여준다. 대기업이 벌어들인 돈으로 세운 미술관인 게티미술관과 삼성 산하 미술관들에 대해 ▲운영 투명성 ▲운영진의 인적 구성 등을 비교해 본다. 미술관은 작품을 사들이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돈 문제’에 관계가 없을 수 없다. 게티도 마찬가지였다. 2005년 LA타임스 신문은, 게티미술관을 운영하는 재단이 돈을 함부로 쓰고 이탈리아-프랑스 등으로부터 도난-도굴된 미술품을 법을 어기면서 사들였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시리즈 기사를 게재했다. 지역 유력지의 의혹 제기가 계속되자 캘리포니아 주 검찰총장은 게티재단(Getty Trust)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검찰총장은 “불법 사항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998년부터 재단 이사장을 맡아온 배리 먼츠는 공금을 사치스럽게 사용한 책임을 인정하며 “2백만 달러(20억 원 상당)에 달하는 퇴직금을 포기하고, 내 개인 돈 현금 25만 달러(2억5천만 원 상당)를 재단 금고에 채워 넣겠다”고 발표하며 사임한다. 그리고 게티재단 측은 재단 기금의 사용을 감시할 외부 이사진을 새로 채용하겠다는 약속을 대외적으로 발표한다. 이런 사정을 보면 공금 횡령 등에 대해 주 검찰이 “불법은 없었다”고 발표하는 대신, 공금의 사적 사용 등에 대해 재단 측이 책임을 지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경과를 보면 게티미술관의 경우 언론의 문제 제기 → 검찰의 적극적 수사 → 미술관 측의 자정 노력이란 과정을 거치면서 운영 투명성을 더욱 높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삼성문화재단 산하 세 미술관의 경우 대외적으로 공개된 내용이 거의 없다. “미술관 관람객이 연간 얼마나 되냐”는 CNB저널의 질문에 대해 삼성문화재단 관계자는 “민감한 사항이라 공개할 수 없고, 사설 미술관이므로 공개할 의무도 없다”고 답변했다.
재단 운영의 깊숙한 사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방문객 숫자까지 이렇게 숨긴다는 점을 보면, 삼성문화재단 산하 미술관들의 운영이 얼마나 비밀스레 이뤄지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운영진 구성 2005년 주 검찰로부터 수사를 받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그래도 게티미술관은 창립 초기부터 미술관장, 재단 이사장 등을 외부의 전문가들에게 맡겼다. 석유 억만장자 폴 게티는 1976년 사망하면서 20억 달러 상당의 엄청난 유산을 남겼다. 이 돈은 게티재단으로 들어가 미술관 운영의 종자돈이 된다. 재단의 초대 이사장은 UCLA 경영대학원장 등을 역임한 해롤드 윌리엄스가 1981년 맡았으며, 1998년 윌리엄스가 퇴임하자 고전문학을 전공하고 휴스턴대학 총장을 역임한 배리 먼츠가 뒤를 이었다. 먼츠는 앞에서 말했듯 2006년 검찰 수사 과정에서 사임했다. 이어 2006년 미술사학자 제임스 우드가 이사장이 됐으며, 2010년 우드가 사망한 뒤에는 역시 미술사학자인 데보라 매로우가 임시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처럼 게티미술관의 최고 책임자(CEO)는 줄곧 외부인사, 미술전문가들이 맡아 왔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삼성문화재단 산하 미술관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거의 완전하게 삼성 오너 패밀리가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는 1993년 삼성문화재단 이사를 맡으면서 재단 일에 관여하기 시작해 1995년 호암미술관장에 취임했다. 2004년부터는 서울 한남동 이건희 회장의 개인집무실인 승지원 옆에 삼성미술관 리움(Leeum)을 오픈하며 관장을 맡았다. 그러나 홍 관장은 2008년 삼성특검 때 ‘삼성 비자금을 이용한 고가 미술품 구입 의혹’과 관련해 검찰 소환조사를 받았으며, 이때 리움 관장직을 사임했다. 홍 관장이 사임한 기간 동안에는 친동생 홍라영이 리움 관장을 맡았으며, 홍라희 관장이 올해 복귀하면서 홍라영은 부관장을 맡고 있다. 일관되게 회장 일가가 미술관 운영의 전권을 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성의 해외 유명작품 선호 이유는 작품 ‘값 비싸야 하기 때문’이라고 사설 미술관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삼성문화재단 산하 미술관들은 항상 세간의 주목을 받아 왔다. 해외 유명 작가의 작품 전시에서부터 미술품을 통한 비자금 관련설까지, ‘삼성의 미술품 거래’에 대한 루머는 연예계 핫 이슈를 방불케 할 정도로 자주 나돌았다. 오리온 그룹의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된 서미갤러리 홍송원 대표가 6월 7일 삼성문화재단과 삼성 리움미술관 홍라희 관장을 상대로 “납품한 그림 14점에 대해 아직 지불하지 않은 50억 원을 달라”고 물품대금 청구소송을 내면서 세간의 이목은 다시 삼성에 쏠리고 있다. 이 소송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서미갤러리가 납품했다는 14점 작품의 총액이 781억 원이나 된다는 점이다. 리움미술관의 예산으로 최근 확인된 바로는 작년 삼성전자가 259억 원을 증여한 것이며, 리움 자체의 예산 조달은 미미한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받은 돈은 259억 원인데 구입한 그림 값은 서미, 단 한 군데로부터만 700억을 훨씬 넘는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해 화랑가에서는 “개인 돈이 작품 구매에 유입된 것 아니냐” “홍 관장의 개인 자산만 1조원이 넘으며 결국 개인 돈으로 작품을 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다. 리움미술관을 비롯한 국내 대기업 관련 갤러리들이 하나 같이 국내 작품을 거의 무시하고 해외 고가 작품 구입에 열중하는 것도 이처럼 ‘개인 돈 사용’과 관련됐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기업 미술관의 작품 구입은 국내 미술계를 진흥시킨다? 국내 작품이라야 가격대가 비싸야 수십억 원 수준에 불과하고, 또 ‘가격조정 폭’, 즉 작품을 팔고사는 과정에서 “얼마에 산 것으로 하자”고 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국내 작품의 경우 상대적으로 좁기 때문에, 아주 값비싼 외국 작품을 선호한다는 지적이다. 해외 미술품 선호에 대해서도 2008년 삼성특검 당시에 문제가 됐던 비자금 연관설도 그치지 않는다. 비자금을 조성하려면 작품 단가가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작가의 작품 중 국내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박수근 작 ‘빨래터’가 46억 원에 그쳤고, 작년 경매에 나온 이중섭의 ‘황소’도 35억 원에 불과했다. 한국 작가의 작품으로는 비자금을 조성해도 액수가 작아 남는 돈이 별로 없다는 지적이다.
한국미술경영연구소 김윤섭 소장은 “기업 입장에서 자금의 안정성 확보가 우선적인 것 같다. 개인적 기호에서 출발한 작품 구매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투자 가치로서 작품을 대한다”며 “한국 작가의 작품이 아직까지는 객관적 자산 가치로 인정을 못 받고 있는 현실도 해외 미술품 구매에 치중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홍 관장이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에 대해서는 “한국 미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홍 관장은 서울대 응용미술학과를 나왔으며 2003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상을 받은 뒤 언론 인터뷰에서 “전공 공부를 계속했더라면 지금쯤 대학 강단에 있거나 공예가 또는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홍 관장은 미술에 관한 한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 일류를 지향하는 삼성그룹의 면모대로 리움미술관의 소장 작품 역시 액수 면에서 국가 미술관 수준을 넘어설 것이라는 게 미술계의 공통적인 평가다. 리움미술관의 소장 작품에 대해 홍보실 관계자는 “소장품에 대해서는 전시를 통해 대외에 알리고 있는 상태이며, 구체적인 숫자와 작품 값 등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미술을 전공한 홍 관장이 국내 미술계를 진흥시킨다는 의견도 있지만 주로 해외의 고가 작품을 구입한다는 점에서 “과연 국내 미술계를 진흥시키는 게 맞느냐”는 의혹의 시선도 불거지고 있다. 이런 시비에 대해 미술품 거래 관행을 잘 알고 있는 한 미술계 관계자는 “삼성 미술관들의 자금 흐름 등에 대한 정확한 근거가 공개돼야 이런 소문을 잠재울 수 있다”며 “삼성 산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숫자와 소장처, 가격 등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나와야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삼성 산하 미술관들이 비자금 조성 통로라는 의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삼성의 미술관들…호암, 리움 그리고 플라토 호암 소장작 15만점…“국가 미술관 수준” 평가도 국내 대기업 미술관 중 규모와 활동에 있어서 선두 역할을 하고 있는 삼성문화재단은 1965년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나눔철학을 바탕으로 설립됐다. 이후 지난 40여 년 동안 문화예술이 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사회적으로는 갈등과 병리 현상을 해소하여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인식 아래 다양한 문화예술 사업을 전개해 왔다. 삼성문화재단 산하에는 △국보 및 보물급 문화재를 포함해 15만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호암미술관 △현대미술 관련 기획전시를 주로 하는 삼성미술관 리움 △1999년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을 상설 전시하면서 개관한 로댕갤러리의 새로운 이름인 플라토, 등, 3개의 미술관이 있다.
호암미술관 용인에 위치한 호암미술관은 고 이병철 회장이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한국 미술품 1200여 점을 바탕으로 1982년 4월 개관했다. 경기도 용인 가실리의 수려한 자연 경관 속에 자리하고 있는 호암미술관은 연건평 1300여 평의 전통 한옥 형태의 본관 건물과, 2만여 평에 이르는 전통 정원 희원(熙園) 및 프랑스 조각의 거장 부르델의 대형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부르델 정원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1997년 개원한 희원은 한국 전통 정원의 멋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으로, 담 안과 밖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한없이 포근한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평가받는다. 본관 1층에는 연중 2회 ‘테마전’이 열리는 기획전시실과 상설 불교미술실이 있고, 2층에는 산수화와 인물화, 도자기가 상설 전시되고 있다.
리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은 선대 이병철 회장에 이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한국 미술사를 기록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들을 수집·보강하고, 한국의 근·현대 작가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인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2004년 10월 13일 개관했다. 리움은 한국 고미술품 전시를 위한 Museum 1과, 한국과 외국의 근·현대 미술품 전시를 위한 Museum 2로 이루어져 있다. 리움의 건물은 세계적 건축가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스가 디자인했다.
플라토 불후의 명작이라 할 오귀스트 로댕 작 ‘지옥의 문’을 1999년 상설 전시하면서 로댕갤러리란 명칭으로 출범한 플라토는 중구 태평로2가 삼성생명빌딩 1층에 자리하고 있다. ‘플라토’라는 새 이름은 로댕 작품의 상설전시는 물론, 국내외 현대 미술의 현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취지에서 새롭게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