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준호(39)의 작업은 마치 수묵을 현대에 재현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작품을 위해 태고의 지층을 쌓듯 캔버스에 검정색, 붉은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을 칠해서 덮어놓는다. 이렇게 사전 작업이 끝난 캔버스에 날카로운 칼날 끝을 사용하여 생각이 이끄는 대로 긁기 시작한 빈 공간을 드로잉으로 완성시킨 작품을 8월3일부터 9일까지 인사동 JH갤러리에서 선을 보인다. 그는 “긁혀진 선들은 태고의 신비를 벗고 작업 초반의 엉성한 형태에서 점차로 산의 형태와 호수, 폭포, 계곡의 윤곽이 뚜렷해진다며, 마치 땅 속에 묻힌 유물을 발견한 후 아주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내는 작업과 같다”며 세밀함을 강조한다. 이준호의 손에 잡힌 칼날 끝은 풍경의 윤곽이 드러남에 따라 닳고 무뎌진다. 뭉뚝해진 커터 칼날의 끝자락은 잘라내면 다시금 시퍼렇게 날이 선 생성의 도구로 변신을 하게 된다. 칼날의 반복적인 행위로 그는 관념 속 풍경을 서서히 구체적 형상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칼날로 긁혀진 공간은 전통 산수의 구도에서 벗어나 사각의 틀 안 화면을 가득 채운 네모의 산수로 변신을 이루며 긁혀져 만들어진 공간 안의 풍경과 그렇지 않은 여백은 분명한 경계의 대조를 확연히 보여준다.
이준호가 긁어내어 만들어 놓은 화면에는 색이 떨어져 나간 하얀 공간과 사이사이 촘촘히 남겨진 선들로 자신이 생각한 공간 안에 한 폭의 새로운 산수화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가 만든 풍경에는 날이 저무는 들판엔 빗소리, 바람소리, 나뭇가지들이 뒤엉켜 비벼대는 음울한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비가 그치고 먹구름은 바람에 밀려 이편에서 저편으로 빠르게 물러나고 있다. 근경에는 긴 선들과 짧은 선들이 서로 얽힌 조형 요소만이 강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경으로 화면을 바라보면 산, 바위, 물 등의 거대한 풍경이 생성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첩첩이 쌓인 선들은 숲을 만들며, 바위산들이 우뚝 솟고 비스듬히 기울기도 한다. 서로 부딪혀 떨어져나간 파편들은 협곡을 만들고, 물의 흐름을 조절하기도 하는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여기에 드러나는 대상들은 현실의 풍경이자 작가 개인의 관념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문의 02-730-4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