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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속에 더없는 행복 그리는 박항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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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0호 왕진오⁄ 2012.04.16 11:21:24

시간과 공간이 태초의 원형으로 존재하는 이상향의 모습을 화폭 속에 담아내는 중견작가 박항률(62). 그는 새와 나무, 먼 산을 조용히 응시하는 단아한 소년의 모습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함께 호흡하고 교감하는 순간의 경건함과 영원함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에는 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들이 있다. 한복을 입고 측면으로 앉은 소녀, 새, 나비, 꽃, 나무, 날아가는 물고기(飛魚)와 사람의 얼굴을 한 새(人面鳥), 천마(天馬) 같은 상상 혹은 신화 속 동물 등이다. 이들은 고요하고 조화롭게 공존하며, 보는 이를 선(禪)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심한 표정을 짓는 인물들은 상상의 동물들과 함께 차분한 색감 속에 몽환적으로 표현된다. 박항률의 작품 속 소재들은 일대일로 대응되는 의미를 갖기보다는 개인적이면서도 추상적이고, 때론 정반대의 가치들이 순환하는 윤회의 진리 속에서 존재한다. 어린 시절 병으로 죽은 누이의 얼굴이 어머니의 얼굴이기도 하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모습 속에서 침묵으로 감내해야 했던 아픔을 느낀다. 현실에서 사라져 환상 속에 존재하는 신화 속 동물의 불안함은 새와 나비의 날갯짓에서도 느껴진다. 그리고 이 모든 움직임들은 자연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하나의 진리로 만난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오늘도 붓끝으로 시를 그린다. 간혹 그림이 시가 되기를 혹은 시가 그림이 되기를 바라면서…. 어린 시절 나에게 시적 감성을 일깨워주고 하얀 나라로 떠나버린 꿈 많던 사촌 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함축적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녀에 대해 “특정한 대상을 보고 그리지는 않는다”고 했다. “어린 시절 같이 지내던 사촌 누이동생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지금의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설명이다. 1992년 당시 추상적으로 그림을 그리던 박 화백은 당시의 까까머리 소년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바로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이후 1994년 재야 사학자들과 몽골 여행을 하면서 고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특히 최인호의 소설에서 몽유도원도가 백제시대 이야기를 담은 것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1994년 몽골 여행에서 본 현지 부족민들의 생활상에 크게 자극받은 작가는 우리 문화 속에 담겨 있는 과거를 현재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에서 보여주는 작업과 병행해 민족성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화면으로 보여주려 한다. 그는 지난 2009년 발표한 자신의 시집 ‘그림의 그림자’에 게재한 시를 통해 자신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볼이 발그레하던 시절의 무모한 야망, 꿈을 먹으리, 꿈을 먹으리. 100년을 사는 하루살이 처럼, 해를 등지고 별을 잊은 채, 하물며 뽀얀 갈빛 먼지가 머릿속을 송두리째 흩트려 놓은 꿈은 허망한 착각.

나는 누구일까? 삶을 재촉하는 하이얀 대낮 고리타분한 바깥으로 달음질쳐 허우적대는 내 몸이 후줄근하게 지쳐 쓰러진 휴식의 방, 어두움이 깔리면 슬며시 찾아드는 의문. 나는 누구일까? 모래알 같은 순간들에 쫓겨 지친 영혼을 못내 곧추 세우는 거추장스런 옷매무새. 내가 있음을 낭비하며 사는 스러지는 세월 속에 잠시만이라도 나를 들여다보고 싶다.” 명상 그리고 평온을 위한 고요한 정진 박항률의 작품에 줄곧 보이는 이미지인 소녀와 인물들은 어려서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사촌 누이와 동생 그리고 어머니의 이미지를 그들의 느낌 그대로 상상해 그려낸 것이다. 10여 년 동안 같은 주제로 이어진 그의 작품에는 생각에 잠긴 인물, 명상을 하는 인물 그리고 이것과 어울리는 풍경과 정물이 주요 소재를 이룬다. 박 화백은 “정오의 명상, 새벽, 순간적인 시간들에 관심을 두었다”며 “아주 짧은 순간에도 명상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이 역시 찰나가 아닌가”라고 했다. 작가는 대학 졸업 후 오브제나 기하학적 추상 작업을 하다가 현재의 인물을 주로 그리게 됐다고 했다. 특히 1991년에 시집을 발표하면서 현재의 작업 쪽으로 방향이 전환된 것 같다고 했다. 앞으로도 자신의 작업 방향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박 화백은 “우리의 전설적인,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담보하고 싶다”며 “길을 걷던 사람이 문득 내 작품을 보고 작은 감동을 받는, 불특정 다수가 좋아하는 화가로 남고 싶다”고 희망을 밝혔다. 최근 선보인 그의 작품들에는 낯과 꿈 그리고 비밀 이야기 등의 주제가 가득 담겨져 있다. 과거에도 비슷한 작업을 선보였지만 ‘비밀 이야기’란 그림을 통해 우리 생활 속에 녹아 있는 선조의 생각을 오늘에 접목하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박항률이 우리 고대사와 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서다. 그가 화업에서 ‘나는 누구인가’란 그의 화두가 느껴지는 이유다.

마음의 명상이란 주제에서 그가 찾고자 하는 궁극의 이상은 우리 민족의 정서가 아닐까 한다. 그가 여행을 통해 느낀 바를 밝힌 다음 글을 통해 그의 작품에 담긴 정서를 파악할 수 있다. “새가 자유롭게 허공을 날아 나의 머릿속으로 날아들 때 이미 상상의 여러 가지 씨앗을 뿌려주고 그 씨앗들이 발아할 때는 신선한 새로운 형태들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었다. ‘머리 위에 새’는 잠자리로 변신하면서, 나비, 비어, 인면조, 정자와 소나무, 꽃, 나룻배로 거듭나게 되고, 더불어 그 이미지들은 자아를 스스로 들여다보며 미명에서 깨어남이나 홀로 고요 속에 침잠되어 있는 그리움을 지니는 뜻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베네치아의 바다 안개를 헤치고 날아온 비둘기는 나의 머리 위에 화려한 영혼의 향기를 뿌려주었고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또한 여행은 분명 나에게 꿈의 무대였고, 그 꿈은 너울너울 나의 그림 속으로 작은 참새가 되어 날아와 앉은 것이다.” 화가 박항률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이어 홍익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현재는 세종대학교 예체능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1977년 한국청년작가회관에서 개인전을 시작으로 갤러리 서미, 갤러리인데코, 웨스턴 온타리오, 인사아트센터, 예술의 전당 그리고 KIAF,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하나은행, 제네바 한국 대표부, 삼성의료원, 성곡미술관, 금호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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