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세상이다. 지하철 폭행이 비일비재하고, 충격적인 토막살인 사건에 문을 걸어 잠그기에 바쁘다. 서로를 의심하고 견제하기 바빠 이웃끼리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않는다. 이렇게 극악무도한 세상에 순해빠진 ‘서툰’ 도둑이 있다. 이 도둑은 집주인 처녀 유화이에게 “왜 문을 잠그지 않았냐”고 잔소리하고, 손목에 상처가 남지 않도록 매듭 묶는 방법을 적어와 실행하고, 궁금증이 많은 집주인의 질문에 일일이 대꾸해주고, 나중엔 집주인의 눈치까지 살핀다. 너무 서투르고 어설픈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진다. 도둑은 서울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5월 28일까지 공연을 이어가는 연극 ‘서툰 사람들’에 나오는 장덕배다. 시트콤 ‘세 친구(2000~2001년 방영)’와 영화 ‘두사부일체(2001)’에서 특유의 코믹스런 연기를 보여준 배우 정웅인(41)이 장덕배 역할을 맡았다. TV나 영화에서 더 익숙한 그는 2009년부터 매년 연극 무대에 오르고 있다. 특히 연극 ‘서툰 사람들’은 영화감독으로도 알려진 장진 감독과 정웅인의 만남으로 눈길을 끈다. 흉흉한 세상 속에 웃음과 따뜻한 온정을 전해주는 연극 ‘서툰 사람들’의 장덕배를 그가 어떻게 연기하는지 들어봤다. - 드라마 ‘오작교 형제들’ ‘아모레미오’를 끝내고 급히 연극에 투입됐는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드라마 촬영이 힘들었어요. 연극 연습과 드라마 스케줄이 겹쳐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장진 감독한테 물어봤더니 ‘그 사람들이 심사숙고해서 너를 캐스팅하기로 결정한 것을 받아들이라’며 ‘먼저 캐스팅돼 연습에 들어간 사람들을 무대에 먼저 올리고 너는 나중에 올리도록 하겠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드라마 촬영에 전념할 수 있었어요. ‘아모레미오’ 같은 경우 사람들 반응도 좋았고 저도 새로운 연기를 보여줄 수 있었어요. 연극 작업에 뒤늦게 참여하게 됐지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 연극 ‘서툰 사람들’을 선택한 이유가 뭔가요? “저와 장진 감독이 대학 동기예요. 학교 다닐 때 친했는데 함께 연극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러고선 10여 년 동안 연락을 잘 못했어요. 그래서 ‘왜 나를 찾지 않나’ 했는데 알고 보니 같이 작품을 하고 싶었지만 캐릭터 이미지 등 여러 상황이 겹쳐서 오해가 생긴 거였어요. 희곡 ‘리턴투햄릿’과 ‘서툰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같이 작품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상대역으로는 예지원 씨가 캐스팅된 상태였고요. 관심도 많이 갔고,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자 출연하게 됐어요.” - 장덕배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특히 극 중 20대로 등장해 화제인데? “장진 감독이 이야기하기를, 유화이와 장덕배를 30대나 40대로 설정하면 인생의 여파를 많이 겪어 풋풋함이 덜할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실제 나이 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저와 예지원 씨가 20대를 연기하는 게 더 좋을 거라고 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장덕배는 인정이 많은 캐릭터에요. 제각기 서툰 사람들이 유화이의 집에 모이면서 겪는 묘한 상황에서 유화이를 지켜주기도 하고요(웃음).” - 20대를 연기하는 노하우는? “모자를 씌워놓으면 다 비슷비슷해요(웃음). 극 중 유화이에게 ‘나 26살밖에 안 먹었어’ 하면서 모자를 벗는 장면이 있는데 첫 공연 때 여기서 웃음이 터졌어요. 사실 잘못된 거죠. 제가 쑥스러워한다는 것을 관객에게 들킨 거잖아요. 하지만 다행히 많이들 웃어주시고 좋게 받아들여주셨어요. 그 다음부터 안 웃으려고 하는데 꼭 그 장면에서 웃음이 터져요.”
- 유화이 역으로 함께 호흡을 맞추고 싶었던 여배우가 있었다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예지원 씨가 기분 나쁠 것 같은데요(웃음). 극 중 유화이는 새침하고 백치미 있는 캐릭터에요. 묘한 매력이 있죠. 제가 생각하기엔 한국의 모든 여자 배우들이 이 역할을 해도 잘 맞았을 것 같아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유화이와 장덕배의 묘한 밀고 당기기 과정과 서툰 모습들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하는 거예요.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예지원 씨와 연기를 하려고 해요. 유화이 역에 이채영, 심영은 씨도 있지만 같이 연기를 하려면 새로 맞춰봐야 하거든요. 사람마다 호흡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니 가장 임팩트가 강하고 좋은 공연을 보여주기 위해 짝을 이룬 예지원 씨와 열심히 연기하고 있어요(웃음).” - 같이 장덕배 역을 맡은 류덕환, 조복래 씨의 연기는 어떤가요? “류덕환 씨는 초반에 본인이 도둑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고 수염도 많이 길렀어요. 무대 위에서 예지원 씨랑 신체적 조건의 차이가 있어서 도둑처럼 보이기 위해 과하게 연기한 점이 있었는데, 작은 몸에서 나오는 호흡과 발성이 좋더라고요. 전 텍스트대로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류덕환 씨가 제 공연을 보고 반성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정말 잘해주고 있고요. 조복래 씨는 건강미가 넘쳐요(웃음)! 공연장에 왔더니 세트가 부서져 있더라고요. 특히 이채영 씨와 건강한(?) 공연을 보여주는 듯해요. 진짜 20대라 건강한 것 같아요(웃음).” - 2009년부터 매년 연극을 해오는 이유는? “연극의 맛이 있어요. TV나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저의 다른 모습을 끄집어내주는 게 무대 위에서는 가능해요. 연극은 얼굴로 이미지 캐스팅을 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어떤 역할을 맡기 위해 1년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할 때도 있어요. 저도 제 자신을 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발성과 발음, 연기는 물론이고요. 무대는 제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장소에요. 또한 본성이 드러나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얼마 전 TV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이보경 씨의 연주를 들었는데 놀랄 정도로 잘하더라구요. 그런데 이보경 씨가 자신의 심성, 인격에 의해서 음악이 나오는 거라고 하더군요. 기술적인 면은 다 할 수 있지만 의미라는 것은 인격에서 나온다고요. 듣는데 연기도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인격이 묻어나는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무대 위에요. 그래서 꾸준히 연극을 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 출연하고 싶은 연극이 있다면? “연극을 특별히 많이 보러 다니지 못했어요. 그래서 특정 작품을 하고 싶기보다는 저를 불편하고 괴롭게 만드는 연극을 해보고 싶어요. 제가 무대 위에서 마냥 편한 것보다 많이 고민하고 불편한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관객도 공연을 즐겁게 보고 감탄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가장 바라는 건 어떤 역할이 있을 때 사람들이 ‘이 역은 정웅인에게 딱이야’ ‘정웅인이 소화할 수 있어’ 같은 신뢰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나는 거예요. 이런 작품을 하나라도 만나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 꾸준히 무대 위에서 감을 잃지 말아야겠죠. 노래가 별로 없는 뮤지컬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요(웃음).” - 배우 정웅인 하면 코믹스런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이에 대한 딜레마는 없었나요? “옛날에는 고민이 많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즐겁게 받아주는 분들에게 감사해야죠. 오히려 저는 코믹스런 이미지를 대중들이 식상해하지 않을까 해요. 그래서 꾸준히 변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입니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하죠(웃음).” - 배우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유치진 선생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어요. ‘배우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돼라’고요. 연기는 인격과 같이 나와요. 정웅인이라는 배우를 캐스팅 하는 사람도 정웅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 알고 캐스팅 한다고 생각해요. 연기는 다 비슷비슷할 수 있어요. 역할에 맞는 이미지는 맞추면 되고요. 하지만 인격은 모두 같을 수 없죠. 많은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연기를 소홀히 하면 물론 안 되죠! 연기는 기본이고, 그 상황에서 현명하게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해요. 또한 나중에 나를 선택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시야를 넓혀야 해요. 저는 연기만 잘하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연기는 극단에 들어가는 등 여러 노력을 통해 다듬어갈 수 있어요. 올바른 인간 됨됨이와 협동심을 키우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 연극 ‘서툰 사람들’ 자랑 좀 해주세요. “지금 자리가 없습니다(웃음). 얼마 전 손님들을 초대했다가 전 좌석이 차서 바보가 된 적이 있어요. 기껏 찾아온 제 손님들은 대부분 U턴해서 돌아가셨죠(웃음). 그 정도로 공연이 잘 되고 있어서 너무 감사해요. 연극을 더 재밌게 보시려면, 연예인이 캐스팅됐다고 그 부분에만 치우치지 않았으면 해요. 연예인 얼굴은 30초만 보면 잊어버리거든요. 연극배우들도 각자 맡은 역에 어떻게, 왜 캐스팅됐는지, 연기를 어떻게 하는지 보러 오시면 더 공연을 즐기면서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또 심오한 철학을 다루는 공연이 아니니 즐겁고 웃고 가시길 바랍니다(웃음).” 마냥 웃길 것만 같았던 정웅인과의 인터뷰는 진지하고 차분하게 이뤄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연기에 대한 진지함이 느껴졌다. 겉모습은 호탕하게 웃지만 속으로는 아직 정웅인에게 숨겨진 비밀이 많은 것 같다. 무대 위에서 하나씩 벗겨지며 양파같이 새로운 속살을 드러내는 그의 연기에 주목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