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호 최영태⁄ 2012.05.22 10:46:15
영화 ‘돈의 맛’을 보면서 내내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재벌 딸을 왜 저렇게 미화할까”라는 생각이었다. 재벌의 아버지와 아들은 악해도 재벌의 딸은 상대적으로 덜 악하다는 것이, 마치 우리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를 생각하듯, 우리 마음 속에 하나의 정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증거를 이 영화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 재벌은 아름답게 그려진다. 재벌가의 상속녀 백금옥(윤여정 분)에게 바지사장 또는 데릴사위처럼 채용된 남편 윤 회장(백윤식 분). 그는 집안의 필리핀인 하녀를 사랑하고, 이 여성이 아내 백금옥에 의해 피살되자 자신의 팔목을 그어 자살을 감행할 줄 아는 로맨티스트다. 하녀를 사랑하던 재벌의 실연과 자살이라는 스토리가 러브스토리답기는 하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더 비현실적인 것은 백금옥의 딸 윤나미(김효진 분)다. 그녀는 윤 회장의 집사인 주영작(김강우 분)에게 연정을 느낌은 물론, 늙은 자신의 어머니와 영작이 성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도(백금옥의 강압에 못 이겼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영작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점이다. 공주가 하인에게 연정을 느끼지 말란 법은 없지만, 나미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영작을 '돈을 주고 산 물건' 정도로 보는데, 유독 나미만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착한 여자'로 성격을 설정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 하녀를 사랑하다 자살하는 재벌 회장님의 삶은 모욕적? 윤 회장의 네 가족(윤회장-백금옥 부부와 딸 나미, 아들 철) 중에서 처절하게 패망하는 것은 윤 회장 뿐이다. 하녀를 사랑하고 독일 가곡을 좋아하는 그의 보헤미안적 기질이 그를 사망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의 자살은 ‘돈이 주는 모욕’ 때문이다. 그는 모욕적인 돈의 맛을 거부하면서 죽어간다. 그러나 백 회장 역시 “원 없이 돈을 써 봤다”는 점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비로소 돈의 더러운 맛을 느낄 뿐, 돈 덕분에 잘 산 인생이라는 데서는 나머지 식구들과 큰 차이가 없다. 윤 회장이 죽어도 백금옥은 여전히 금권을 쥔 냉혈 여성으로 기업군을 관리하며, 아들 철은 각종 비리 혐의로 구속까지 되지만 아버지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줌으로써 무죄 방면되고, 딸 나미는 비록 ‘집사 사원’ 영작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상한 행동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재벌가의 딸로서 쭉쭉 잘 나갈 것 같다. 결국 이 영화에서 ‘돈의 더러운 맛’을 느끼기는 힘들다. 재벌의 돈에 모두 굴복하는, 치사하고 더럽더라도 돈에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는 현대 한국인의 초상을 이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재벌과 미국은 건드리지 말라"는 한국의 금기를 깼는데… 주영작은 윤 회장의 비극적 죽음을 보며, 윤 회장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돈의 모욕’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하고, 백금옥 여사의 지시에 반발하는 용감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고도 회장님 딸의 사랑을 받으니 특별히 다복한 행운을 타고난 모양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삼성그룹의 내밀한 사정을 아는 고위직으로서 삼성그룹의 범죄적 행위에 반기를 든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경우, 한국 사회의 두 금기(‘미국과 재벌에 대들지 말라’) 중 하나를 어겼다는 죄로 사랑을 받기는커녕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는 괴로움을 맛봤다. 현실에선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재벌에 대들고도 잘 사는’ 모습을 영화는 보여주니 영화의 판타지는 정말 좋은 것 같다. 나중에 비극적으로 돈에 모욕을 받아도 좋으니, 일단 원 없이 돈을 써보고 싶다는 한국인의 절절한 판타지를 이 영화는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