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하태임 작가, 수십 번 덧칠한 선과 색이 만들어내는 소통의 통로

밝고 경쾌한 색감으로 에너지 전하는 젊은 추상작가의 대표

  •  

cnbnews 제276호 김대희⁄ 2012.05.30 13:56:26

하나의 미술 작품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비춰지고 감정을 전달한다. 어떤 이에게는 감미롭고 달콤한 작품이라도 방금 이별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견디기 힘들게 가슴 저린 작품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어떤 이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그림일 수도, 낙서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다. 정해진 형태 없이 다양한 느낌을 전하는 그림 즉, 추상작품의 묘미도 이런 데 있다. 구상과 달리 바라보는 관점과 감정에 따라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지만 이를 끄집어내기도 힘든 게 추상화이기도 하다. 흔히 추상 하면 먼저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아틀리에의 개인 작업실에서 만난 하태임 작가는 요즘 젊은 작가로는 보기 드물게 추상 작업을 하고 있다. 단순해 보이면서도 짧은 선들과 밝고 경쾌한 색감이 어우러져 강인한 인상을 주는데 추상임에도 결코 어렵다거나 복잡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추상 작업을 할 의도는 당연히 없었어요. 처음부터 추상을 하기는 힘든 것 같아요. 단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컬러밴드 작업도 이전 작업으로부터 시작됐고 컬러 하나하나에, 또는 그 순서에 의미를 담는 거죠. 아버지의 추상 작업이 인상에 남아 있었던 영향도 있어요.”

작고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하인두 작가가 아버지이며 동생 하태범도 작가다. 예술가 집안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과 함께 살았다. 모든 게 그림과 연관됐고 미술이 곧 놀이였다. 하지만 그녀의 원래 꿈은 화가가 아니라 시인이나 소설가였다. 그러던 중 중학교 시절 플롯을 배우면서 음악을 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동생은 그림을 잘 그렸어요. 항상 동생과 비교가 됐고 사실 열등감도 있어 그림을 안 하려고 했죠. 고등학교 때 우연히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어요. 이때 고민을 하게 됐죠. 미술이냐 음악이냐. 이런 고민을 아버지에게 털어놨고 그때 하신 말씀을 듣는 순간 깨달았어요. 그동안 미술에 대한 숨겨왔던 감정이 다 터져 나왔어요.” 그녀는 동생과 경쟁을 할 만큼 미술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런 욕심을 참고 음악과의 사이에서 고민을 하던 그녀에게 아버지가 한 말은 간단했다. “미술 할 녀석이 왜 음악을 해!” 부모님은 그녀를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국내 미술학원은 입시미술 위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혼자 프랑스로 떠났고 디종 국립 미술학교를 거쳐 파리 국립 미술학교(파리보자르)까지 졸업하게 됐다. 이후 만9년 만에 석사까지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반구상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인물을 위주로 자신의 자아를 표현한 작품이었다.

“한국과 프랑스 문화에 대한 고민과 욕망을 그린 작품이었어요. 괴상하고 폭력적인 그림이었죠. 파리 보자르국립예술대학에 편입하면서부터 적응하기 시작해 마음이 편해지니 그림도 주제도 바뀌게 됐어요. 진정한 소통이 있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문자와 소통에 관심을 갖게 됐고 문자나 부호 등을 그렸어요. 지금과 달리 색채가 어둡고 고뇌하는 분위기였죠. 지금도 소통이라는 주제에서 이어져 통로라는 제목의 작업을 하는데 완벽한 소통은 어렵다는 생각에 그 통로를 만들고자 했어요.” 그때 밑그림으로 그린 문자를 지우던 방식이 지금의 컬러밴드 작품이 됐다. 진정한 소통은 지식이나 문자, 부호가 아니라는 의미로 지우게 됐다. 컬러밴드들은 지우는 행위에서 나온 그녀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이전 작업에 대한 보완과 수정으로부터 지금의 작업을 시작한다. 그녀는 작업을 할 때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진행 상항에 따라 작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캔버스 위의 여러 색 컬러밴드들은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칠한 결과다. 한 획을 긋고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위에 또 칠하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색을 묽게 만들어서 투명하게 칠한다는 점이다. 최대한 투명하게 하기 위해 여러 번 덧칠하는데 그 이유는 밑바탕 색이 비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에 색들이 서로 교차하지만 묻히지 않고 보이게 된다. 맑고 투명한 색을 추구하려는 그녀의 의지가 담긴 작업이다. “색마다 칠하는 횟수도 달라요. 붉은색과 남색이 가장 잘 올라오고 노란색이 정말 안 올라와요. 노란색은 기본적으로 12번에서 15번까지 칠해야 해요.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칠해야 하기에 정말 시간이 오래 걸려요. 바탕이 하나의 단면으로 된 작품은 그나마 빠르게 작업할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색이 섞일수록 작업시간도 늘어나죠. 요즘에는 그냥 하나의 선이 아닌 선의 결을 살리려 노력하고 있어요.” 색 선택에 대해 그녀는 “색 경험에 따라 골라진다”고 했다. 되도록 보색대비를 많이 쓰는데 밑바탕은 보색대비 위주이며 위에 입혀지는 색은 자신만의 색으로 작업한다. 예전의 컬러밴드 작업은 똑같은 붓으로 길이도 같았고 색도 다양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길이도, 크기도, 색감도 형형색색으로 더 화려해졌다. 점점 컬러밴드들이 살아나는 모습이다. 선의 결이 느껴지면서 속도감까지 느껴질 정도다. 너무 밝고 활발한 그녀의 성격이 작품에 그대로 반영된 듯 보였다. 단순해 보이지만 선과 색을 조형어법으로 풀어내고 어떻게 교차하고 색상을 나타내느냐를 항상 고민한다는 그녀는 색과 선에도 변화를 주고자 한다.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녀는 작품의 감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말이나 문자 등 언어를 빼고, 작가의 경험까지도 배제한 채 관람자의 경험으로 느끼고 감상하면 돼요. 서로 다른 감정으로 각자가 그림과 소통하도록 만들고 싶어요.” 추상을 고집하는 건 아니지만 색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는 그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개념과 지금의 작업이 너무나 잘 맞는다고 한다.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그때를 알 수 없으며 아직 할 작업과 갈 길이 멀다는 그녀에게서 우리 추상미술의 미래가 밝아 보였다. - 김대희 기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많이 읽은 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