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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YS-이재오의 ‘박근혜 역사인식에 결함’에 꼭 찬성할 수만은 없는 이유

박 후보의 ‘5.16은 불가피한 선택’은 인정되지만, ‘유신체제 평가는 역사에’는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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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83호 최영태⁄ 2012.07.17 10:08:53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5.16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과 ‘10월유신은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라는 역사인식을 어떻게 봐야 하냐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5.16에 대한 박 후보의 인식은 “그럴 수도 있다”고 긍정할 수도 있지만, 유신에 대한 심판은 역사에 맡겨야 한다는 인식에 대해선 “그건 아니지”라고 반론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5.16 뒤 국민은 "한번 보자"…10월유신 뒤엔 바로 "반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이뤄질까?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당장 그 현장에서의 반응을 보는 방식이다. 5.16이 일어났을 때 한국인의 반응을 봐 그 역사적 정당성을 판정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뒤돌아봐서 평가하는 방식이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뒤돌아보니 그랬군”이라고 사후에 회귀적으로 뒤돌아보는 방식이다. 이 두 방식으로 5.16과 10월유신을 나눠 보자. 우선 5.16이 일어났을 당시 한국에선 큰 반대가 없었다. 이는 당시 한국에서 군대를 대적할만한 세력이 사실상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을 통해 최신 경영기업과 조직역량을 함양한 한국군은 한국 내 최고의 조직이었고, 그 최고의 조직이 나라의 위기상황을 맞아 들고 일어났을 때 국민들은 “한번 지켜보자”고 기회를 줬다. 5.16에 대해 ‘불가피하지만 최선의 선택이었다’라고 호의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대목이다. 5.16에 대해선 현재 입장에서 뒤돌아봐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 이전에 이미 1961년 당시에 국민들로부터 그 정당성을 일부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 국민들로부터 "한번 기회를 줘보자"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해서, 그 뒤의 '뒤돌아보는' 평가에서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경과에 따라 미래의 시점에서 판단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월유신은 달랐다. 10월 유신이 단행(1972년)되자마자 바로 전국의 대학에서 반대가 일어났고 이어 1974년 육영수 여사 사망, 1979년 박정희 대통령 피살 등의 비극이 이어진다. 유신이 없었다면 이런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10월유신은 발생 직후 이미 “이건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지금 되돌아봐도 마찬가지다. "공산주의를 포함해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이었다"는데 왜 재평가가 필요한가 1948~1963년 주한미국대사관 문정관을 지내 해방 이후 한국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그레고리 헨더슨은 저서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유신시대 언론통제는 히틀러 말년의 그것과 비슷했다. 박정희는 북한의 위협이 수그러들고 있는데도 10월유신을 강행했고, 유신헌법은 공산국까지 포함해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인 헌법 중 하나, 즉 독재주의적 괴물이다”라고 썼다. 이처럼 어떻게 보더라도 비극적 사건인 10월유신을 놓고 “역사에 심판을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면, 도대체 그 역사는 어떤 역사인지 박근혜 후보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5.17쿠데타는 광주항쟁이란 유혈사태를 불렀다. 용납할 수 없는 사태였기 때문이다. 그때 보나, 지금 되돌아보나 분명한 5.17쿠데타에 대해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는 유신체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극악무도한 정권이 들어서 한국사 교과서를 완전히 뜯어고치고, 국민들의 의식을 완전히 세뇌시키기 전에는 "유신체제도 뒤돌아보니 괜찮았네"란 평가는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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