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호 최영태⁄ 2012.07.18 17:44:52
5.16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엇갈린다. 그러나 한국에서 어떤 사안이 일어나면 항상 그렇듯, 주한 미국 대사관이 사태를 어떻게 파악했느냐를 참고하는 게 상당히 중요하다. 그리고 미국 측의 판단을 보여주는 자료가 1948~50년과 1958~63년에 주한 미대사관 문정관을 지낸 그레고리 헨더슨이 쓴 책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다. 이 책에서 헨더슨은 “5.16 쿠데타 세력의 첫 번째 본질은 민주주의의 억제다. 1910~45년의 일본 장군들처럼 그들은 토론이 행동을 옆길로 빠지게 하고 투표가 행동을 지연시킨다고 믿었다”고 썼다. 헨더슨의 이런 판단은 상당한 근거를 갖는다. 박정희는 1942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했고 1944년 만주군 소위로 임관됐다(‘다음 백과사전’에서 인용). 박정희의 주요 경력이 만주국에서 이뤄졌으며, 국가운영에 대한 참고사항도 주로 만주국에서 따왔다는 점은 여러 증언이 뒷받침한다.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전혀 몰랐다” 일본 군이 만든 괴뢰 정권인 만큼 만주국에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생전 박정희와 가까웠던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전혀 몰랐다”고 증언했다(전인권 저 ‘박정희 평전’ 참고). 4.19혁명으로 민주주의의 꽃이 지나칠 정도로 핀 대한민국에서 박정희 장군은 만주국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서부처럼 만주국은 ‘일본의 신천지’였으며, "젊은 테크노크라트, 전문 기술자, 학자들이 일본에서 약속된 지위를 버리고 가능성의 대지를 찾아 만주국으로 건너갔다…그들의 의지는 순수하고 이상주의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거기엔 중대한 무언가가 결여돼 있었다. 그건 '올바르고 입체적인 역사인식'이었다. 말과 행위의 동일성이 없었다"고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더그라운드 2’에서 언급했다. 야심찬 인물들이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꿈을 원칙없이 펼쳤던 곳이라는 의미다. 5.16쿠데타는 민주주의를 억압하면서 만주국 식의 경제개발을 한국에서도 이뤄보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만주국 식의 경제개발 전략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자본을 특정인에게 몰아줘 산업을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반발하는 노동자는 무력으로 제압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박정희식 개발전략을 21세기 한국인은 그리워하고 있다. 슬픈 현실이다. 사후적으로 평가할 때 억압적이었지만 경제개발을 이룬 박정희의 ‘공’은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경제를 위해 총칼로 민주주의를 찍어 눌렀다는 ‘과’는 반드시 지적돼야 한다. 경제‘민주화’ 하겠다면서 5.16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명박 시대를 지나면서 한국인들은 “아직 민주화가 미진하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은 경제‘민주화’ 요구로 분출되고 있다.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민주화가 시대의 화두란 의미다. 이런 마당에 박근혜 후보는 5.16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했으니 비난을 받는 게 당연하다. 박 후보와 관련해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논란은 앞으로 대선 국면에서 계속될 전망이다. 박 후보가 박정희의 공과 과에 대해 좀 더 객관적으로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과를 더 우선적으로 언급하기를 바래본다. 이는 친노가 “노무현은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하면 비난을 받고, “노무현의 공은 물론 과도 뛰어넘겠다”고 해야 겨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