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호 최영태⁄ 2012.09.14 09:42:57
인혁당사건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발언을 둘러싼 시비가 시끄럽다. 그도 그럴 것이 인혁당 사건만큼 무섭고, 살 떨리게 만드는 사건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 사건에 대해 ‘아직도 시비가 남았으니 판단은 역사가 할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그것도 여러 차례에 걸쳐 했으니 국민의 가슴이 찢어지는 게 당연하다. 여기서 ‘국민’이라는 개념을 한 번 생각해 보자. 박 후보가 대선 출정식 선언문에서만 ‘국민’을 80번 이상 말했다는 게 새누리당의 자랑이다. 여태까지 초점이 국가에 맞춰져 왔다면, 앞으로 국민만 바라보며 정치를 할 것이란 선언이다. “국민만 보겠다”고 할 때의 그 국민에는 ‘말 잘듣는 국민’만 들어가나? 그러나 초점을 국가에서 국민으로 옮겼다는 게 그렇게 자랑일까. 이미 한국의 흐름은 이른바 ‘1987년 체제’를 통해 국가에서 국민→개인으로 초점이 옮겨져왔다. 새누리당이 2012년 대선을 맞아서야 “맞아, 초점은 국민이 돼야 해”라고 깨달았다면, 여태까지는 국가에만 초점을 맞춰왔다는 소리도 되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좋다. 뒤늦게라도 국민만 보고 달리겠다니 좋은 방향 전환이다. 그런데, 이때의 국민이란 게 도대체 어떤 국민이냐 또한 문제다. 한국인은 국민이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듣는다. “국민의 힘으로 경제난국을 헤쳐 나가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듭시다” 등의 구호로. 이런 구호에 맞춰 국민들은 허리띠를 아직도 졸라매고 있고, 국난에 처해서는 금니까지 빼내며 나라를 살려냈다. 그러나 경제위기를 벗어나고 보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더 못살게 됐고, 재벌 등 지배층의 재산만 더 불어나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산업역군’으로 칭송받던 일꾼들이, 처지를 개선해보겠다고 파업이라도 벌이면 바로 그 순간부터는 “때려 죽여도 되는 비국민”으로 전락된다는 사실이었다.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 국민의 범주가 마음대로 바뀌는 게 문제란 소리다. 인혁당 사건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정권이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은 사람들은 산업역군으로 치하를 받았지만, 단지 “유신체제는 곤란하다”고 항의를 했다는 이유로, 어제까지 국민이었던 사람들을 ‘비국민’으로 격하시켜, 사법 시스템을 동원해 전격 살인해버린 것이 인혁당 사건이다. 미국-독일에서 정치인이 흑인-유대인 비하발언 하면 어찌 되는지 아나? ‘비국민’에 대한 무자비한 살인의 다른 예로는 미국의 흑인 탄압,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이 있다. 독일의 유력 정치인이 “가스실 살인에 대해서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고, 미국의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가 “흑인에 대한 린치가 정당했는지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면, 정치적 생명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생명도 바로 끝난다.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군사독재 시대에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은, 말하자면 미국의 흑인 또는 나치 시대의 유대인 같은 대우를 받았다.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비국민', 특히 정치적으로 대드는 비국민에게 가차없이 린치를 가하는 행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저도 국민에 들어가나요?"를 당국에 물어보고 "그렇다"는 대답을 받아야 안심할 수 있는 나라다. 요즘 박근혜 후보는 국민대통합 광폭행보를 벌이고 있다. 이 국민대통합에, 제발 과거 인혁당 사건 관련자 같은 ‘비국민’, 고분고분하지 않은 정치적 반대자까지 포함시키길 바란다. 비국민까지 껴안을 수 있는 포용력이 없다면, 갈가리 찢어진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될 자격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