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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 ‘추억의 비밀’ 겹겹이 쌓아 하모니 들려줘

마음의 고향에 대한 비밀, 살짝 드러내는 작업 선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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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02호 왕진오⁄ 2012.11.26 10:37:44

1969년 뉴욕으로 건너가 스쿨 오브 비주얼아트와 예일대 대학원을 졸업한 작가 김웅(68)은 이후 스쿨 오브 비주얼아트 교수로 재직하며 뉴욕 하워드 스콧 갤러리 전속작가로 작업을 병행했다. 그가 선보이는 작품들은 마치 기억 속 여러 가지 이미지를 저장해둔 저장소처럼 자연과 인간이 보내온 시간들이 층층이 쌓여 하모니를 들려주는 듯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고국 땅을 떠나 이국 생활을 한지 무척 오래지만 기억 속 시간과 이미지는 이상하게 더욱 생생해지는 것 같다. 그림 속 이미지는 마음과 뇌리에 각인된 내 추억의 집합체인 것 같다" 그가 그려낸 화면은 색동 같기도 하고 조개껍질 같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개장의 표면을 연상시킨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물감과 붓질, 물감의 층들이 얼룩져서 이룬 두터운 재질감이 두드러지는 추상회화이다.

김웅의 추상은 단지 물감이나 재료, 붓의 흔적으로 만들어진 추상이 아니라 그림을 이루는 여러 요소를 공들이고 다듬어 그 안에 자신의 어린 시절 보았고 뇌리에 머물고 있는 모든 기억들을 보여주고 있어서 더욱 흥미롭다. 이 그림 속에는 전통적인 것들, 한국적인 것들을 표상화시켜 마치 연금술사에 의해 만들어진 소중한 보물처럼, 화면의 깊이를 더욱 공고히 해주고 있다. 작가가 자란 고향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것이다. 김 화백의 그림은 추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동적이고 강한 필선들이나 세부표현에서 보여준 활기찬 색조의 대조와 활짝 트인 평면적인 표면처리 그리고 여러 가지 오브제를 연상시키는 추상화된 형상들과 원래 추상적인 형태나 얼룩, 긁힌 흔적들이 추상과 구상으로 양분하기 어려운 그림이다. 추상적 타원형, 불규칙한 오각형 그리고 직선이나 포물선들이 추상회화가 가지는 비물질적인 순수한 형태가 아니라, 두꺼운 마티에르와 속도감이 물질적인 '오브제' 아니면 어떤 '물질' 같은 느낌을 준다.

그의 그림 속에서 평면으로 처리된 널찍널찍한 표면들은 미국에서 1970년대 전반에 걸쳐 새로운 주류를 이루었던 '미니멀아트'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고 두꺼운 마티에르로 처리된 구상성이 있는 즉 어떤 오브제를 연상시키는 형상성 내지는 추상성이 강한 형태 부분은 장 뒤뷔페의 높이 쌓아올린 마티에르 표현과 강한 필선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그가 비주얼아트에서 같이 배웠다는 몽골드의 조용한 미니멀 회화에서 평면화된 표면처리를 받아들였다면 이와는 반대로 생동적인 마티에르 처리의 묘미는 뛰어난 솜씨에 있어서 1950년대 초의 앵포르멜 추상시절 장 뒤뷔페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생동감 있는 콜라주와 원색의 강한 처리는 과연 그림이 가지는 모방할 수 없는 회회성의 절경에 들어선 느낌이다. 김 화백이 장 뒤뷔페를 좋아한다고 했고, 어느 일부분에서 일치하지만 다른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뒤뷔페의 소위 반문화적 입장, 특히 우연성의 강조와는 달리, 작가의 그림에서는 세련된 문화적 기운이 있으며, 마티에르와 선 처리에서의 우연성이 아주 배제되지는 않지만 질서가 있으며, 비이성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인 화면구성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기억을 머금은 화폭에 디아스포라의 애환 담아 김웅의 화면은 복잡하고 깊고 두텁다. 그의 화면이 보여주는 두꺼운 부피와 깊이는 어떤 동경과 회상, 아련한 상실의 비애를 감싸 안고 있다. 그것은 단지 표면위에 올려진 이미지나 표면 자체가 내용이 되는 차원만은 아니다. 그의 그림은 그 피부에 전적으로 다 있다. 하지만 그 피부는 겉모습일 뿐이다. 모든 깊이와 상상과 이야기와 시간의 흔적들을 표면으로 불러들이고 펼쳐 보이면서도 심연을 간직한 모순적인 피부다. 그 표면은 기억을 축적하는 공간이자 동시의 작가의 기억을 회상하는 추억의 표면이다. 무의 공간, 알 수 없는 미혹의 공간에 가시적 영역을 설정하고 그 영토를 비밀스럽고 암시적이며 매혹적인 시각의 장으로 가꾸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화면을 색채와 붓질, 물감의 결로 덮어 조형적인 가공의 완벽한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조형성의 근본을 매우 간결하게 보여준다. 때론 납이나 청동처럼, 때로는 타일이나 벽돌담벼락, 장판의 표면처럼 연출하고 있다. 유화물감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질감, 느낌을 자유로이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콜라주의 자국처럼 부풀고 융기된 표면은 다양한 조각들이 얹혀 있어 미묘한 질감과 표정이 부여되면서 흡사 우리네 옛 궁궐의 돌담이나 방안의 장판지를 붙여나간 자국들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것이다. 어떤 그림은 고분벽화를 연상시키고 있다. 해와 달, 별자리와 방위의 신들이 기호와 상징으로 표명되고 호출되어 있는 듯 한 그림, 부적과도 같은 이미지는 아득한 신화와 역사의 시원을 보여주고 일깨운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은 "신화란 인간이 상실한 낙원에 대한 추억을 상기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다. 작가에게 있어 그림이란 잊혀지고 지워진, 그러나 선명하게 달려들고 상기되는 추억과 기억, 시간의 여운들을 안쓰럽게 호명하고 그것을 살려내고 다시 육체를 입히고 다듬어 자신에게 절실한 문장으로 만드는 행위와 일치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통을 기억의 형태로 몸 속 가득히 저장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다. 고국을 떠난 지 오래었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떠나기 전의 추억을 온전히 저장하고 있다. 오히려 이곳에 사는 이보다 그의 기억 속 시간은 불변하고 침전되어 더욱 생생히 과거의 순간을 간직하고 있다. 김웅 화백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장판, 보자기, 민속기물, 깨지고 눌러 붙은 장판의 느낌이자 자개장 등 사물로부터 환생한다. 그 사물들에 대한 촉감, 지각, 기억의 이마주가 그의 작품의 원천이다. 사물로부터 특정한 일부만을 간결하게 추출하여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미술에 있어서의 추상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가 만드는 화면이란 공간은 다시 무수한 공간으로 쪼개지고 분열되고 흩어지다가 이내 전체적인 구조 속으로 단단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복잡하고 촘촘하게 직조되고 맞물린 저부조의 표면처리가 돋보인다. 그 조각조각들은 시간과 기억의 편린들을 머금고 있는 단위들이다. 현재가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과거는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기억의 형태로 몸속에 저장된 전통이 그가 물려받아 자신의 작품 구석구석에 숨겨놓은 토속적인 자기의 원천이다. 흐르고 망실되는 시간의 일방적인 흐름에 저항하는 것은 바로 기억이다. 기억은 흐르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서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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