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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 한화그룹 편 2화

29세 때 그룹전권 물려받은 김승연 회장, 2대 걸친 독점사업 덕에 10대 재벌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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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02호 박현준⁄ 2012.11.26 11:11:31

1973년 2월에는 대일유업(현 빙그레)을 인수했다. 1967년 9월 13일 대일양행(주)으로 설립된 뒤 1973년 유처리 가공허가를 얻어 대일유업(주)으로 상호를 변경했다가 한국화약에 인수됐던 것이다. 1976년에 미국 퍼머스트와 기술제휴를 맺고 상호를 대일퍼머스트유업(주)으로 변경했으나 정부의 국산상표 사용 권장에 따라 상표를 ‘빙그레’로, 상호도 대일유업(주)으로 환원하고 1979년에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1973년 9월에는 동원공업㈜을 인수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태평개발㈜을 설립했다. 1974년 5월과 9월에는 김포요업㈜과 유니온포리마㈜를 각각 설립했으며, 1975년 12월에는 성운물산㈜을 설립하고 1976년 5월에는 성도증권㈜을 인수했다. 성도증권은 1962년 설립 이후 성장을 지속한 우량한 증권회사였다. 1977년 11월에 상호를 한화증권으로 변경하고 1986년 11월에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1975년 10월에는 특급호텔인 서울프라자호텔을 서울시청 광장 전면에 개관해서 관광업에도 진출했다. 본관은 지하 3층, 지상 22층, 별관은 지하 8층, 지상 18층의 규모이며 총 400개의 객실과 6개의 레스토랑, 6개 국어 동시통역시설을 갖춘 그랜드 볼룸을 포함한 9개의 중대형 연회장, 피트니스센터, 스파, 비즈니스센터, 수영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전쟁 이후 대참사 1977년 이리역 폭발 ‘곤욕’ 1976년 12월에는 고려시스템산업㈜을 설립하고 1977년 7월에는 한국베아링공업(신한베어링) 창원공장을 준공했으며, 1978년 8월에는 태평양엔지니어링을 새로 설립하고 같은 해 9월에 한국화약 여수공장을 준공했다. 1979년 5월에는 물류업체인 삼희통운㈜을 설립하고 1980년 2월에는 한국플라스틱공업의 경영권을 재인수했으며, 1981년 2월에는 대일유업(빙그레) 김해공장을 기공하는 등 활발한 다각화작업을 전개해서 한화그룹을 완성했다. 국내 유일의 독점기업인 한국화약의 견고한 성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와중에 1973년 3월에는 천안시 동남구 신부동에 고교야구 명문인 북일고등학교를 개교하기도 했다. 한화그룹이 세간에 잘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전북 이리(익산)역 대폭발사고가 발생하면서부터였다. 인천에서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의 전용화물열차인 제1605호 열차가 정식책임자도 없이 다이너마이트와 전기뇌관 등 40톤의 고성능 폭발물을 싣고 이리역에서 출발 대기 중에 폭발사고가 난 것이다. 호송원 신무일이 어둠을 밝히기 위해 밤에 켜 놓은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은 것이 원인이었다. 원칙적으로 열차의 단선 교행은 폭탄 및 화학 화물화차가 여객열차보다 우선순위로 운행이 되고 있으며 화약류 등의 위험물은 신호장, 신호소, 간이역은 물론 모든 철도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 하는 규정을 무시한 결과였다. 이 사고로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이재민 2000여 세대 1만여명이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었다. 익산시 전체 가구의 70%가 파손되는 등 한국전쟁이 이후에 가장 큰 인재사고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위험물을 취급하는 기업의 허술한 안전의식이 대재앙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창업자 김종희가 1981년 7월 23일에 향년 59세로 사망하면서 한화그룹은 2세 경영체제로 전환한다. 김종희는 슬하에 딸 영혜와 아들 승연, 호연을 두었는데 당시 장남인 김승연은 29세의 청년으로 195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196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74년 멘로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 드폴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공군장교로 군복무도 마쳤다.

김승연이 2대 총수에 취임하면서 해낸 첫 작품은 1981년에 한양화학(현 한화케미칼)과 한국다우케미칼을 한꺼번에 인수해서 석유화학사업에 진출한 것이다. 한양화학은 다우케미칼이 충주비료와 50대50 비율로 1969년에 합작투자해서 설립한 업체로 1974년에 주식을 상장했으며, 한국다우케미컬은 1975년에 다우케미컬이 100% 출자해서 설립한 외국기업이었다. 다우케미컬은 미국의 화학 전문업체로 세계시장에서 독일의 바스프사와 1, 2위를 다투던 기업으로 1897년 캐나다 출신 화학자 Herbert Henry Dow가 미들랜드의 염전 바닥에 침전되어 있던 화학물질인 브롬을 추출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면서 설립됐다. 설립 초기에는 표백제와 브롬화 칼륨을 판매했지만, 이후 응용 플라스틱, 응용 화학제품, 해수정화, 농화학, 기초플라스틱, 기초 화학제품, 탄화수소와 에너지 분야로 핵심 사업을 확장했다. 특히 다우케미컬의 해수담수화 설비는 아랍에미레이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에서 식수와 농업용수 확보를 목적으로 활용되어 왔다. 창업자 김종희 59세 타개, 장남 김승연 등장 1983년에는 합작선인 유니언오일로부터 주식을 전부 양수받아 경인에너지를 내국기업화하는 한편, 매출을 2배 이상 늘려 재계로부터 ‘제2의 창업’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경인에너지는 1987년 9월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1982년대 초에는 국제전광을 인수했으나 한화그룹이 국내 정상의 재벌기업집단으로 부상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정아그룹(구 명성그룹, 현 한화호텔&리조트)의 인수였다. 정아그룹은 1968년에 전남 광주에서 김철호(金澈鎬)가 택시 10대로 운수업을 시작한 이래 단기간에 재벌화한 국내 최초의 관광전문 기업집단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김철호가 전격 구속됐다.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서울 명륜동지점의 대출담당 김동겸 대리와의 공모를 통해 불법으로 사채를 끌어다 사업자금으로 활용한 사실이 검찰에 적발됐던 것이다. 당시 정아그룹은 마땅한 캐시카우사업이 없어 막대한 규모의 사업확장 자금을 편법으로 동원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83년 9월에 정아그룹이 통체로 부실기업 정리대상에 포함됐다. 1985년에 한화그룹이 정아레저타운(콘도미니엄사업)을 비롯해서 정아컨트리클럽, 정아관광, 정아건설, 서울교통, (주)명성 등 정아그룹의 주력업체 6사를 한꺼번에 인수했는데 인수 당시 정아그룹 6사의 재무구조는 표와 같다.

인수 당시 정아그룹의 주거래은행인 상업은행은 “명성그룹의 총자산을 1861억 원으로 평가했으나 한국화약은 자산 1140억 원, 부채 2845억 원이라고 했다. 결국 한국화약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한국화약이 명성그룹을 인수할 때는 자산을 초과한 부채 중 1097억 원을 8년 거치, 12년 분할상환의 특혜를 받았고 정리채권의 출자전환금조로 두 차례에 걸쳐 50억 원의 금융지원을 받았다”(이종재, 『재벌이력서』, P.330) 1986년에는 빙그레이글스(현 한화이글스)를 창단하고 서울청량리역사 백화점을 오픈했으며 1987년에는 제일경제연구소, 한국자동차부품, 한국정밀 등을, 1988년에는 제일투자자문, 한양소재, 한국바스프우레탄 등을 잇따라 설립하고 1990년에는 경향신문을 인수했으나 1998년에 계열분리됐다. 당시 한화그룹은 한양그룹계열의 한양유통(현 한화겔러리아)까지 인수함으로써 주력기업인 화약을 비롯한 에너지, 기계, 관광, 유통, 식품, 건설, 요업, 석유화학, 부동산사업 등 21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명실상부한 문어발 경영체제를 갖추었다. 이를 계기로 한화그룹의 재계 순위(매출액 기준)는 1980년의 11위에서 1985년에는 7위로 부상했다.

한화그룹도 2대에 걸쳐 완성됐다. 창업자 김종희가 재벌화의 기초를 마련했고 김승연은 이에 근거하여 기업인수 등을 통해 단기간에 한화그룹을 완성했던 것이다. 한화그룹은 SK그룹, 한일합섬그룹 등과 함께 1980년대에 급성장한 재벌로 평가됐다. 1994년 그룹 이미지 통합작업을 통해 계열사의 상호를 ‘한화’로 통합하고 1995년 5월에는 동양연료(주)를 인수했다. 동양연료는 1964년 3월에 동양가스연료(주)로 설립돼 1968년 12월에 김포가스충전기지를 설치했고 1995년에 한화그룹에 편입됐다. 같은 해 7월 해남석유(주), 한국연료(주), 한일에너지(주)를 흡수합병한 후 한화에너지프라자(주)로 상호를 변경하고 석유류 판매, 액화석유가스기기의 제조 및 판매업 등의 사업을 영위했다. 1997년에는 1979년에 설립한 그룹 내 물류담당 계열사인 삼희통운을 한익스프레스로 상호를 변경했다. 삼희유통은 1981년에 대일육운을 흡수합병해서 1989년에 주식을 상장했는데 주력사업은 내륙운송, 3자 물류(Third Party Logistics), 국제물류 등 물류관련 서비스이다. 3자 물류란 화물주에게 배송, 보관, 유통가공 등 두 가지 이상 물류기능을 종합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다. 내륙운송 분야에서는 화공품, 독극물, 유류 등 특수 화물분야의 운송에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트랙터, 탱크로리, 벌크트레일러, 탱크트레일러, 카고트럭, 윙바디 등 500여대의 차량으로 물류 사업을 진행 중이다. 2010년 9월 현재 내륙운송 매출비중은 56.27%, 3자 물류와 국제물류 비중이 각각 20.87%다. 최대주주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친누이인 김영혜로 보유지분은 특수관계인을 포함해 50.77%다. 계열사로는 중국 현지법인이 있다. 해고 없는 창조적인 ‘구조조정 마술사’ 별명도 한화는 1993년에 그리스 아테네은행을, 1996년에 헝가리 엥도수에즈 부다페스트은행(현 헝가리한화은행)을 각각 인수했으나 1997년 외환위기로 말미암아 혹독한 구조조정시기를 거쳐야 했다. 이때 한화 바스프우레탄, 한화에너지, 한화자동차부품 등을 매각했다. 외환위기 수습과정에서 30대 재벌의 3분의 1이상이 자금난으로 좌초됐다. 그중에서도 특히 공격경영을 감행했던 2세 경영인이 운영하던 그룹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한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바탕 홍역을 치룬 것이다.

1997년 12월에 한화종합화학과 독일 바스프사가 50대50으로 합작, 자본금 1132억 원으로 설립한 한화바스프우레탄의 지분을 바스프사에 1000억 원에 매각했다. 또한 FAG한화베어링을 설립하고, 한화석유화학과 한화종합화학을 분할했다. 1998년 1월에는 한화기계와 일본정공(NSK)이 50대50의 합작으로 설립해서 운영 중이던 한화NSK정밀을 NSK사에 200억 원에 매각했다. 1999년에는 한화에너지를 현대정유(현 현대오일뱅크)에 매각, 한화에너지 발행 주식의 38.817%(950만 주)와 한화에너지프라자의 발행주식 100%(400만 주)를 약 498억 원에 넘겼다. 발전부문 자산은 분할되어 한국종합에너지(현 포스코파워)와 인천정유(현 SK에너지 및 SK이노베이션)로 재발족됐다. 또한 1999년에 에틸렌을 비롯하여 프로필렌, 벤젠, 톨루엔, 자일렌, 스티렌모노머, 부타디엔 등 각종 석유화학산업의 기초원료를 생산하는 국내 최대의 NCC(Naphtha Cracking Center)업체인 여천NCC를 대림그룹과 합작해서 설립하기도 했다. 유화사업 맞교환 등의 해고 없는 창조적 구조조정으로 국내는 물론 산케이신문, 로이터통신 등에서 김승연은 ‘구조조정의 마술사’란 별명을 얻었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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