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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 두산그룹 편 2화

SK·쌍용·애경같이 귀속재산 불하, 재벌사상 최초로 핵심기업 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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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06호 박현준⁄ 2012.12.24 15:38:41

해방 직전 한국에 있던 일본인들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이에 대비해 투자액을 회수하는 방안을 극비리에 강구하고 있었다. 소화기린맥주의 경영진도 자본회수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주주인 박승직이나 김연수가 대신 경영해줄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박승직과 김연수는 이들의 제의를 거부했다. 해방 직후 소화기린맥주에는 한국인 종업원 4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20여명의 사원들이 자치위원회를 서둘러 구성하고 공장가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5년 9월 25일 미군정청은 법령 제2호로 ‘일본인재산 이양에 관한 법령’을 제정, 국내에 있는 일체의 일본인재산을 적산(敵産)으로 간주하고 정부관리 하에 둔다고 발표했다. 이후 미군정은 민간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귀속기업을 민간에 불하하기로 결정했다. 귀속재산 처리에 대한 정부의 방침이 확정되자 박두병은 1945년 9월 하순에 소화기린맥주를 운영하기로 결심했다. 대신 50여 년간 가업으로 유지했던 박승직상점은 9월말에 폐업했다. 국내 최대 동양맥주 귀속재산 불하 받아 박두병은 미군정청과 접촉을 시도해 1945년 10월 6일부로 소화기린맥주 관리지배인에게 임명됐다. 일제하 해당 기업의 기존 주주 및 임직원들에 우선적으로 관리권이 주어진 때문이었다. 1948년 2월 27일에 동양맥주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OB’라는 상표를 붙여 면모를 새롭게 일신했다. 두산이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기회였다. 또한 전통적 사업방식에서 근대적 경영방식으로의 전환이기도 했다. 한편, 1948년에 무역업 등을 목적으로 한 두산상회(두산산업의 전신)를 새로 설립했다. 1950년에는 홍콩에 게살통조림을 수출하였을 뿐 아니라 운수업도 겸했다. 두산상회는 구형 포드승용차 2대와 일본군이 사용했던 도요다 트럭 2대로 택시운수와 화물운송업을 병행했다. 또한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는 미국의 대외 원조(ECA)계획의 일환으로 수입된 원조트럭 14대(이스즈 트럭 13대와 닛산트럭 1대)를 외자관리청과 접촉해 불하받았다. 불하자금은 저축은행으로부터 3억5000만 원(圓)을 융통해 충당했다. 같은 해 10월 29일에는 두산상회를 자본금 299만 원의 (주)두산상회로 재발족하고 박두병은 회장에, 아우 우병이 사장에 취임했는데 당시 주차장은 부산 영도에 뒀다. 피난시절 운송수단이 매우 부족해 두산상회의 운수업은 호황을 맞이했다.

이 무렵 정부는 동양맥주의 민간불하를 추진해 1952년 3월 22일에 공개입찰에 붙였다. 응찰자는 박두병 혼자뿐이어서 같은 해 5월 22일에 관재청과 박두병 간에 귀속재산 권리매매계약을 체결했다. 불하가격은 34억1366만6360환으로 계약 시 3억6338만6360환을 납부하고 나머지 30억5028만 환은 9년에 걸쳐 분할상환하기로 했다. 1953년 2월 정부는 전시 인플레 수습차원에서 화폐단위를 원(圓)에서 환으로 변경했는데 교환비율은 1환=100원이었다. 계약금은 박승직이 보유했던 서울 근교의 부동산에 대한 지가증권(地價證券)과 일부는 시중에서 액면가의 30%로 거래되던 지가증권을 매입해 충당했다. 이로써 박두병은 정부로부터 1만8500여 평의 대지와 57건의 건물을 포함한 주식 5만9540주와 부수재산 일체를 인수받았다. 국내 최대의 맥주회사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창업자 박승직은 1950년 12월 22일 향년 86세로 사망했다. 1960년 7월 1일 동산토건을 설립하면서 다각화작업도 본격화했다. 동양맥주 영선과를 확충해 자본금 500만 원의 독자의 사업체로 발전시킨 것이다. 동산토건은 동양맥주의 공장건물 보수 및 사택 건설과 외부수주 등으로 1970년대에는 국내 굴지의 토건회사로 성장했다. 1961년 11월에는 풍국화학공업을 인수, 한국맥아공업(韓國麥芽工業)으로 개명했다. 풍국화학은 1958년 10월에 서울 양평동 3가 16번지에 대지 2286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맥주의 주원료인 맥아를 생산하는 공장을 건설 중이었으나 자금난으로 중단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동양맥주는 맥아의 자체조달을 목적으로 풍국화학을 인수했던 것이다. 중단된 건설작업을 동산토건에 맡겨 1962년 12월에 연건평 1100평의 맥아생산공장을 완성했다. 1963년 6월 20일에는 대관농산(大關農産)을 설립했다. 맥주 원료의 100% 자체조달을 목적으로 호프(hop)를 생산하기 위해 1960년에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속사리에, 1963년에는 도암리에 대대적으로 호프재배를 획책하고 이를 전문화시키기 위해 대관농산을 발족했던 것이다. 이 회사는 1972년 1월에 동양맥주에 흡수됐다. 동양맥주의 첫 번째 수직계열화 작업이 완성된 것이다. 1967년 5월 5일에 자본금 5000만 원의 (주)윤한공업(潤韓工業)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동양맥주의 공무과를 분리해 동양맥주의 기계 제작수리 및 외부수주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1970년 11월에는 고척동 76번지에 대지 1710평, 건평 702평을 확보하고 중형자동차 정비 및 기계제작업체로 성장했다. 1969년 4월 11일에는 농어촌개발공사와 한국유리공업, 동양맥주 등 3자 합작으로 자본금 1억 원의 한국병유리를 설립했다. 경부선 군포역 인근인 경기도 시흥군 남면 당리 140의 1에 1만3000여 평의 공장부지를 확보하고 일본 동양그라스가 건설을 담당했다. 1970년 7월에는 한국유리공업이 보유한 주식 35%를 동양맥주가 인수함으로써 한국병유리의 발행주식 95%를 장악했다. 1971년부터 한국병유리는 맥주병, 환타, 콜라병 등을 생산하면서 동양맥주와 한양식품에 납품했을 뿐 아니라 그해 10월에는 40만 달러 상당의 콜라병을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이로서 동양맥주는 원료인 호프, 맥아의 생산에서부터 병유리까지 자체 생산함으로써 수직적계열화를 완성했다. 한편, 다른 업종으로의 다각화를 추진하기도 했는데 첫째, 합동통신의 인수였다. 박두병이 합동통신에 관계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이 회사의 주식 49%를 확보하면서부터였다. 1960년 4.19혁명 이후에 합동통신이 경영난에 직면하자 나머지 주식을 인수했다. 둘째, 금강융단(자본금 500만 원)의 인수였다. 이 회사는 1955년 11월에 서울 문래동에 대지 2584평, 공장건물 1031평을 마련하고 국내 최초로 융단제조를 목적으로 설립, 연간 5~6만 달러를 수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영난에 직면하면서 박두병이 1964년에 주식 51%를 인수했다. 당시 무역법은 반드시 수출실적이 있는 자에 한해서만 수입무역을 허가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동양맥주는 몰트, 호프 등 맥주원료를 수입하기 위해 수출실적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 회사를 인수한 것이다. 셋째, 청량음료사업에의 진출이었다. 동양맥주는 1956년부터 청량음료사업에 진출해 ‘OB시날코’를 생산했고 1962년부터는 ‘OB콜라’도 제조했다. 그러나 원액 공급과 외환사정이 여의치 않으면서 매출액이 점차 감소했다. 이 무렵에는 코카콜라가 세계 140여 개국에 판매망을 확충해 세계 최고의 청량음료메이커로 군림하고 있었다. 박두병은 코카콜라와 연결, 1966년 5월 25일에 자본금 2억 원의 한양식품을 설립했다. 코카콜라로부터 원액을 공급받아 시판 및 군납하기 위해서였다. 3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영등포구 독산동 310의 1번지에 대지 1만5000평을 확보하고 1967년 3월부터 동산토건이 시공에 참여해 1968년 2월에 완공하였는데 생산능력은 1분당 370병이었다.

동산토건 설립, 사업다각화 본격화 넷째, 수산업에도 진출했다. 1965년 6월 14일에 충남 서산군 근흥면 정죽리 일대의 해안 18만평에 대한 공유수면 매립허가를 얻은 후 새우양식업에 착수한 것이다. 내자 및 한일어업협력자금으로 공사에 착수해 1966년에 48핵타아르의 양식장을 완공했다. 동양맥주 내에 수산부를 신설하고 본격적으로 새우생산에 착수한 결과, 1968년에는 7톤, 1969년에는 13톤을, 1970년에는 8톤을 생산해 수출 및 내수에 충당했다. 다섯째, 1970년대에 금융업에도 진출한다. 1972년 ‘8.3조치’ 이후 사채업을 제도금융권으로 흡수하기 위해 정부는 단자회사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재벌들이 앞 다퉈 단기금융업에 진출했는데 두산은 1973년 6월 7일에 국내 최초의 단기금융업체인 한양투자금융을 설립했다. 초대 사장에는 박두병의 경성고상 후배이자 한일은행장을 역임한 하진수(河震壽)가 선임됐다. 여섯째, 전자산업에의 진출이다. 1974년 2월 18일에 한국OAK주식회사(자본금 102만2900달러)를 미국의 OAK와 합작으로 설립했다. TV, 라디오, 전자계산기 등의 인쇄회로기판과 배관부분 밀봉용 테이프의 생산을 목적으로 경기도 김포군 오정면 오정리에 부지 9223평을 확보하고 1974년 4월에 1000평의 공장을 완공했다. 두산그룹은 박승직, 박두병 등 2대에 걸쳐 완성됐다. 박승직이 조성한 시드머니로 박두병이 복합기업집단을 만들었다. 두산그룹의 단초는 소화기린맥주의 불하로 이후 수직 및 수평적 다각화를 통해 재벌로 성장한 것이다. 두산그룹은 SK그룹, 쌍용그룹, 애경그룹 등과 함께 귀속재산 불하를 통해 재벌로 성장한 대표적 사례다. 한국 최고(最古)의 기업 두산그룹의 사업내용은 1997년 말의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물장사 위주의 소비재산업에서 자본재산업 위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박승직상점이 오픈한지 꼭 100년만이었다. 미증유의 경기침체와 관련해서 간판급 재벌들이 잇따라 좌초하거나 공중분해됐다. 중화학 관련 대규모 장치산업의 피해가 더 커지면서 수많은 우량기업들이 헐값에 매물로 나오곤 했는데 두산은 이를 기회로 해서 종래 경박단소형의 사업구조를 중후장대형으로 리스트럭처링했던 것이다.

1996년에는 창업 100주년을 맞아 사업구조를 개편했다. 기술소재 사업군에 두산건설, 두산기계, 두산유리, 두산전자, 두산제관, 삼화왕관 등의 6개사, 정보유통 사업군에 두산상사, (주)오리콤, 두산동아, 두산레스피아, 두산정보통신, OB베어스, 두산개발 등의 7개사, 생활문화 사업군에는 두산종합식품, (주)두산, 두산씨그램, 두산백화, 두산경월 등의 5개사, 투자회사에 보람은행 등 3개 사업군 18개 회사와 1개의 투자회사로 계열사와 투자회사를 대폭 통폐합했다. 1998년 9월 1일 두산상사, 두산경월, 두산백화, 두산개발, 두산동아, 두산기계, 두산전자, 두산정보통신, OB맥주의 식품부문 등 9개 회사를 통합해서 (주)두산으로 변경했다. 외환위기에 구조조정, 경박단소에서 중후장대로 한편, 2000년 12월에는 한국중공업을 인수해 2001년 3월에 두산중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인수대금 마련 내지는 주력사업 개편에 소요되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2001년 6월에 그룹의 주력인 OB맥주를 매각했다. OB맥주는 1996년 2월 오비맥주로 상호를 변경하고, 이듬해에는 두산음료를 흡수합병했다. 1998년 9월 세계 4위의 맥주회사인 벨기에 인터브루(Interbrew Corporate)와 합작, 외자 2억7000만 달러를 유치하면서 선진 경영시스템을 도입해서 수출확대와 해외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1999년 12월 카스맥주를 흡수합병해서 연 128만kl의 생산능력을 갖추고, OB·카스·카프리·버드와이저 등을 미국·일본·몽골·홍콩 등 세계 18개 국가에 연간 4000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그러나 2001년 6월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 일환으로 (주)두산의 보유지분 45%를 인터브루에 매각함에 따라 12월 OB맥주는 두산그룹에서 제외됐다. 한국 재벌 역사상 그룹의 핵심기업을 과감하게 처분한 경우는 두산그룹이 최초였다. 또한 2001년 12월에는 기계사업 부문을, 2006년 11월에는 종가집 사업부문을 대상(주)에 각각 매각했다. 종가집은 강원도 횡성에 공장을 마련하고 1987년 세계 최초로 진공포장 김치를 선보이며 포장김치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이래 국내외에서 꾸준한 매출신장을 기록, 토종식품인 김치의 상품화를 선도한 기업이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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