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이한구의 한국 재벌사]동부그룹 편 1화

김준기 회장, 젊은 패기와 사업열정으로 단숨에 재계부호 랭크

  •  

cnbnews 제319호 박현준⁄ 2013.03.25 23:08:30

동부그룹 창업자 김준기 회장의 부친은 강원도 삼척 태생의 유명 정치인 김진만(1918~ 2006)이다. 그는 일본 랑화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고향인 삼척에서 집권당인 자유당 후보로 당선됐다. 또한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역시 여당인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서 금배지를 달았다. 이후 그는 제10대까지 6번이나 내리 국회의원에 당선돼 요직인 공화당 원내총무와 재정위원장, 제9대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7선 의원이다. 한편 정치인 김진만은 1964년 5월 석회질소와 카바이트를 생산하는 삼척산업을 인수,경영을 시작했다. 이 회사는 삼척을 무대로 한 소규모의 향토기업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의 경영실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준기, ‘산업보국’ 결심 후 사업에 뛰어들어 김진만의 형들도 정치활동에 참여했다. 맏형 김진구는 제헌의원과 참의원을 역임했으며, 김진팔은 해방 직후인 1946년 2월에 이승만과 김구 등이 범국민적 반탁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 활동 반대, 좌익운동 봉쇄 등을 목적으로 결성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비서장 출신이었다. 반탁운동(신탁통치 반대운동)이란 1945년 광복 직후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결정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대해 범국민적으로 전개했던 반대운동이다. 일본통치 36년도 견디기 어려웠는데 또다시 외세의 지배가 연장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국민감정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의 여론이 반탁(우익)과 찬탁(좌익)으로 양분되면서 한때 해방공간을 뜨겁게 달구었다. 김준기는 1944년 12월 4일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현 동해시)에서 김진만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최고 명문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진학해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군복무 후 복학한 그는 1968년에 미국을 방문, 전자업계를 견학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현격한 경제발전 격차를 몸소 실감하고 기업인으로 입신하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그의 경영철학인 산업보국(産業報國)관도 이때 구체화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업보국 혹은 제철보국, 산업보국 등은 산업화기 한국과 일본, 중국 등지 기업가들의 가치관 속에서 자주 확인된다. 이는 산업활동으로 애국(愛國)한다는 의미로 유교문화권 기업가 정신의 전형이기도 하다. 귀국 후 1969년 1월 24일에 자본금 2500만 원의 미륭건설(1989년에 동부건설로 명칭 변경)을 설립했다. 당시 직원은 2명이었는데 자본금은 외가로부터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초 그는 외화가득률이 높은 관광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는데 종합관광단지를 개발하려면 우선 건설회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 관광객을 실어 나르려면 관광회사와 여객운송회사를 세워야 하고 관광객들이 여행경비를 쉽게 마련할 수 있도록 상호부금회사도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종합관광레저사업은 당시 여러가지 이해부족과 모함 등 국내 여건으로 인해 결국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 대신 당초 구상한데로 1971년 11월에 장거리 여객 운송업체인 동부고속운수(주)를 설립하고 1972년에는 동부관광과 동부상호신용금고(2002년 동부상호저축은행으로 변경)를 각각 설립했다. 1969년 창업 첫해 김준기가 영위하던 사업의 매출액은 9200만 원이었다. 젊은 패기로 중동에서 건설로 외화 벌어 미륭건설은 도급순위에 상관없이 입찰할 수 있는 민간부문 발주공사와 주한 외국인 발주공사에 파고들었다. 그러나 미륭건설이 도약의 기회를 잡은 것은 1970년대 초 서독정부로부터 100만 달러를 기부 받은 연세대가 발주한 국내 최대의 이공대학 건축공사 수주였다. 이후 해외건설공사에 주목, 1975년 4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해군기지 건설공사를 4500만 달러에 수주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륭건설이 중동시장에 참여하게 된 데에는 1970년대 초반 국내 경제상황과 연관이 있다. 제1차 오일쇼크 여파가 불어 닥쳤고, 극심한 불황은 대한민국을 국가부도 위기로 몰고 갔다. 외화를 버는 것이 나라를 돕는 길이라 생각한 김준기 회장은 즉시 본사에 해외시장 대책반을 구성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 해외지사를 설치했다. 노력한 보람은 주베일 해군기지 입찰요청서로 나타났다. 알고 지내던 미군 감독관의 도움이었다.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 섭씨 50도의 모래벌판 위를 에어컨도 없는 대절택시로 누볐다. 현지 확인을 위해서이다” (이종재, 재벌이력서, P275) 김준기는 “이 공사에 자신의 운명을 맡겼다. 자재를 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동경으로 독일로 정신없이 날아 다녔다. 터를 닦고 빌딩을 세우고 관련시설을 구축해야 하는 최초의 복합공사여서 자재를 구하는 노하우가 전혀 없었다” (이종재, 재벌이력서, P275) 어렵게 공사를 마무리한 결과 1760만 달러를 벌었다. 1977년 7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의 해군 육상기지 건설공사를 2억5000만 달러에 수주했고, 1980년 5월에는 3억2000만 달러의 사우디 국방성 본청 건물공사를, 1982년에는 사우디 외무성 건물공사를 1억5000만 달러에 수주했다. 1980년 중동에서 공식 철수할 때까지 김준기는 5년간 총 2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1981년 당시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69억 달러였던 점을 고려하면, 김준기가 중동에서 벌어들인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가늠될 수 있다. 항간에서는 현찰이 가장 많은 기업이 동부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동부그룹, 보험업계 진출로 재계 전면에 부상 덕분에 미륭건설의 국내 도급순위는 창업 첫해 600위에서 1978년에는 6위로 급등했을 뿐 아니라 김준기 개인의 소득순위도 국내 1~2위를 기록했다. 약관의 청년사업가 김준기가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인 것은 엘리트로서의 탁월한 사업 감각 탓이기도 했다. 김준기는 기업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을 몽땅 재투자해서 1976년에는 삼척산업(1985년 동부산업으로 변경)을 인수했다. 삼척산업은 부친 김진만이 경영하던 회사로 부도직전의 회사가 동부로 인수되어 경영합리화를 거쳐 우량기업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1979년 6월 대영실업(하역, 포워딩업체)과 부산운수(하역업)를, 1979년 11월에는 한미면업(운송, 창고업)을 각각 인수해서 동부고속에 흡수합병했다. 이로써 동부고속은 새롭게 화물운송 및 하역, 창고업에 진출했다. 동부가 재계 전면에 부상한 계기는 1980년 한국자동차보험(1995년 동부화재해상보험으로 상호변경)의 인수였다. 한국자동차보험은 1962년 3월 공기업인 한국자동차보험공영사로 창립해 1963년 자동차손해보상 책임보험 판매를 개시했다. 1968년 11월 1일 한국자동차보험(주)으로 법인전환을 했고, 1973년 기업을 공개해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77년 자동차 종합보험 개발 및 운전자 보험을 개발·판매하기 시작했는데, 한국자동차보험은 동부가 인수할 때까지 국내 자동차보험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1983년 동부그룹에 경영권이 인수된 뒤 화재보험을 비롯한 가계성 보험 등 손해보험 판매도 시작했다. 1982년 12월에는 납입자본금 200억 원의 국민투자금융을 설립했다. 1988년 6월 한국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고 9월에 동부투자금융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91년 7월 증권업 영업을 개시하면서 동부증권으로 또다시 업종을 변경했다. 1984년에는 냉간 압연 및 압출 제조업체인 일신제강(현 동부제철)을 인수해 1985년 1월에 동부제강으로 변경했다. 냉간 압연이란 강철 따위의 금속재료를 상온(常溫)에 가까운 온도에서 압연 가공하는 기법을 의미한다. 압연공정에 따라 강재는 냉간 압연 강재와 열간 압연 강재로 구분되는데, 냉간 압연 강재는 열간 압연 강재에 비해 고급일 뿐만 아니라 독특한 광택을 보유한 제품으로 당시 냉간 압연은 첨단기술이었다.

국내 최초의 냉연제품 메이커인 일신제강은 1955년 8월에 평안북도 출신의 주창균(朱昌均)이 설립한 신생산업이 모체다. 1960년에 일신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1961년에는 서울 오류동 1만6000여 평 부지에 강관공장(일신제강)을 준공했다. 이후 일신제강을 철강업계의 선두주자로 키워 1970년대에는 일신제강, 한국마방적, 일신산업, 삼창강재 등 일신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무리한 사세확장에 따른 자금난에 직면, 1982년 장영자 사기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일신제강이 동부그룹에 인수됐다. 장영자는 일신제강에 자금을 융통해주는 대가로 채권액보다 매우 큰 규모의 회사채를 확보, 시중에 유통시켰다. 그러나 일신제강이 만기 때 변제하지 못해 부도처리 됐던 것이다. 동부제철은 2011년 현재 국내 최대 전기로 제철업체다. 장영자 사기사건 덕에 일신제강 인수 1984년에 한국자동차보험의 자회사로 손해사정업체인 한국자보서비스(1995년 동부자동차보험 손해사정으로 변경)를 설립하고, 1986년에는 울산석유화학을 인수해서 동부석유화학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던 1988년에는 복합비료업체인 영남화학(동부한농)을 인수했다. 영남화학은 1973년 충주비료와 호남비료를 통합해서 재발족한 한국종합화학공업의 자회사였다. 또한 1988년에는 동부문화재단도 설립했다. 1989년에는 동부애트나생명보험(1995년 동부생명보험으로 변경)과 동부창업투자, 동부엔지니어링을 각각 설립하고, 동부산업은 전문무역상사로 출범했으며, 1990년에는 동부석유화학과 영남화학을 합병해서 동부화학으로 전환했다. 1992년에는 동부산업에 정보통신 본부를 신설하고, 1995년에는 (주)한농 및 계열사들을 한꺼번에 인수했다. 한농은 1953년 4월 28일 한국농약(주)로 설립된 뒤 1956년 3월 인천에 농약공장을 설립하고 1975년 12월 기업을 공개했다. 1977년 3월 (주)한정화학(동부정밀화학)을 설립했고, 같은 해 10월 경북 구미에 농약공장을 준공했다. 1981년 10월 (주)한농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12월에는 국내 최대의 종묘사인 (주)한농종묘를 설립했다. 1995년 5월 동부그룹 계열사로 편입된 뒤 1996년 12월 동부한농화학(주)으로 상호를 변경했고, 1997년 3월 동부화학(주)과 합병했다. 1999년 9월 11월에 합금철사업부를 양수받아 2001년 1월 동부한농종묘와 합병했다가 2006년 3월 (주)동부한농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배너
배너
배너

많이 읽은 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