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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종묘스토리 ⑥]종묘와 소나무

도성 불바다 때 소헌왕후 일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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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22호 박현준⁄ 2013.04.15 12:56:54

1623년 3월 12일 한 밤중. 한양 궁궐에 불길이 치솟았다. 당황한 광해군은 시종한 내시에게 종묘도 불타는지를 물었다. 타성(他姓)에 의한 반역이면 종묘를 불태웠을 것이고, 왕족이 반정을 하면 종묘는 무사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한양 도성에 불이 났다면 과연 임금은 어디부터 끄라고 지시했을까? 임금의 머릿속에 항상 떠나지 않는 곳이 종묘다. 조상의 영혼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나라의 다른 표현은 ‘종묘사직’이다. 종묘를 잃는 것은 나라를 잃는 것이요, 종묘가 불타는 것은 나라가 불타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진화 1순위는 곡식을 쌓아놓은 창고도 아니요, 나라의 행정을 하는 관아도 아니었다. 바로 종묘였다.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가의 사당인 종묘는 나라의 상징이었다. 세종 8년(1426년) 2월 15일 한양 도성이 불바다로 변했다. 한양의 중부, 남부, 동부가 화마에 휩쓸려 잿더미가 된 것이다. 한양 사람 열 명 중에 한 명 이상이 피해를 봤다. 그날의 참상이 실록에 기록돼 있다. 점심 무렵에 서북풍이 강하게 불었다. 한성부의 남쪽에 사는 인순부의 하인인 장룡의 집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시전과 나라의 부역을 담당하는 관청인 경시서가 불탔다. 또 북쪽의 행랑 106칸과 중부의 인가 1630 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연소됐다. 인명 피해는 남자 9명, 여자가 23명이다. 그러나 어린이와 늙고 병든 사람으로 타죽어 재로 화해 버린 사람은 계산되지 않았다. 세종 8년 대화재, 인구 11만 도성 이재민만 1만명 당시 한양은 2만여 호에 인구는 11만 명에 가까웠다. 세종 10년(1428년) 한성부 장계에 보면 도성의 집이 1만 6921호, 인구는 10만 3328명이었다. 도성 밖 10리에는 집이 1601채에 인구 6044명이었다. 불은 도성 안에서 일어났다. 2000여 채가 불탔기에 이재민이 1만 명 가까이 발생한 엄청난 화재였다.

당연히 조정은 비상이었다. 모든 군사와 백성이 불끄기에 나섰다. 비상사태를 맞아 소헌왕후는 서울에 있는 모든 대신과 백관에게 전교한다. “화재가 발생했다. 돈과 식량이 들어 있는 창고는 구제할 수 없게 되더라도, 종묘와 창덕궁은 힘을 다하여 구하라.” 당시 임금인 세종은 군사훈련 겸 사냥인 강무(講武)를 하고 있었다. 남양주에서 시작한 강무의 목적지는 강원도 횡성이었다. 조정의 고위 관료는 영의정이 도성에 남았으나 상당수는 군사훈련에 동행하고 있었다. 문인기질이 강한 세종이지만 조선에서 군사훈련을 가장 철저하게 한 왕이기도 했다. 문무를 겸비한 군주였다. 국방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인 임금은 32년 재위기간 동안 27회의 강무를 실시했다. 강무 기간은 열흘에서 보름 사이다. 임금은 수천 명의 군사와 함께 말을 달려 강원도 평강을 17차례나 찾았다. 강무는 군사훈련인 만큼 혹독했다. 특히 추운 겨울에는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진눈깨비가 내린 13년(1428년) 2월 20일에는 추위에 얼고 굶주림으로 26명이 사망하고 말 69필과 소 1두가 죽기도 했다. 세종은 강무장에서 도성의 급보를 듣는다. 도성에 돌아오기에 앞서 세종은 모든 의전절차를 생략하고, 불끄기에 전력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세종도 걱정한 게 종묘의 안위였다. 그날 1차 불길이 잡혔다. 저녁에 대신들은 소헌왕후에게 화재 상황을 보고했다. 소헌왕후는 말했다. “오늘 재변의 참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나마 종묘가 보전된 것만도 다행한 일이다.” 한양의 10~20퍼센트가 불탄 참혹한 상황에서도 소헌왕후는 종묘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 임금의 부재중에 일어난 도성 대화재에서 왕비는 종묘만큼은 지키려고 한 것이다. 도성에 돌아온 세종은 화재 발생 닷새 후에 소방대책을 발표했다. 방화시설 설치, 소화 작업 담당구역 설정, 소화 책임관서 설치 등이었다. 특히 종묘에는 불을 끄는 소방기계를 설치하도록 했다. 랑 사이에 담장을 높이 쌓아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도록 방화장을 구축한다. 체계적인 특별방화대책은 효과를 나타냈다. 세종 13년(1431년) 4월 3일, 2품 이상의 대신들이 백성의 집과 종묘의 화재예방책을 논의한다. 이 과정에서 시행 중인 방화대책 덕분에 그 후 불이 났으나 화재가 크게 번지지 않았음이 소개된다. “병오년 화재가 난 뒤로 여러 신하의 건의로 각 방(各坊)의 민가에 도로를 개통한 덕분에 지난 그믐날의 불로 사망한 사람은 없다.”

맹사성 건의에 방화 예방책으로 소나무 솎아 벌채 이어 임금은 종묘의 화재 예방을 위한 생각을 밝힌다. “종묘에 소나무가 없으면 진실로 화재가 없을 것이다. 지금 소나무가 무성하기 때문에 전일의 화재와 같은 것이 혹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된다. 지금 솎아내는 것이 어떠할까.” 이에 대해 맹사성이 아뢰었다. “종묘 담 안의 소나무는 자로 재어 솎아서 베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로써 울창했던 종묘의 소나무는 일정한 간격으로 솎아 베어졌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간벌에도 소나무는 계속 번성했고, 중종 6년(1511년)에는 종묘 담장 밖 인가에서 난 불이 담장 안 소나무에까지 번지기도 했다. 조선의 화재대책은 종묘의 화재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중요 기관 중에서도 종묘가 제일 먼저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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