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에 이재준은 종합건설업체인 (주)삼호를 인수했다. 동사는 1956년 10월 17일에 설립된 천광사(주)를 모체로 1974년에 삼호그룹 창업자 조봉구(1919~2010)가 설립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조봉구는 1954년에 경남모방을 설립한데 이어 국내 최대의 조선방직을 인수, 가장 큰 면방직업자로 성장했다. 1960년대 초 서울 방배동에 소모방공장을 건설하면서 일찌감치 부동산에 눈을 떠 강남일대에만 37만여 평을 확보했다. 당시 그는 역삼동과 도곡동 일대의 땅을 평당 200~500원에 구입했는데, 10여년 만인 1970년대 초에 평당 가격이 4000~5000원으로 뛰어 일약 부동산 거부가 됐다. ‘돈병철, 땅봉구’란 말이 회자된 시기도 이때부터다. 이후 자신 소유의 부동산가치 제고 차원에서 삼호주택((주)삼호)을 설립하고 방배동과 반포동 일대에 대규모 삼호아파트단지를 조성했던 것이다. 삼호 등 시공능력 상위 건설사 인수로 몸집 불려 (주)삼호는 1977년 12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으며, 1978년부터 해외건설 시장에 진출, 1970년대 말에는 도급(시공능력)순위 5위에 랭크될 정도로 급부상했다. 그 와중에 다각화에도 열중해서 1980년대 초반에는 (주)삼호, 삼호유통, 삼호개발, 경남모방, 동광기업, 화동탄좌, 동강기업, (주)한양, 수원CC, 제주 오라CC 등 13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9위의 삼호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삼호그룹은 산업합리화 조치로 1984년 8월 24일에 별안간 해체됐다. 정부는 중동건설 시장에 무리하게 진출해서 부실화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삼호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 측의 정치자금 제공 요구를 거절한데 대한 정치적 보복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986년 부실기업정리방침에 의거, 1986년 7월에 (주)삼호, 삼호유통, 삼호개발, 동광기업 등 4개 업체가 대림산업에 일괄 인수됐다. 이때 오라관광(주)도 함께 인수했는데 동사는 1977년 6월 24일에 설립되어 제주시 연동 263-15의 제주그랜드호텔(509실)과 오라CC(36홀)를 운영하는 관광레저업체다. (주)삼호는 1997년에 산업설비공사업 면허를 취득하고, 1999년 10월에 대림흥산(주)을 흡수 합병했다. 2009년 1월에 채권금융기관협의회의 공동관리 절차가 개시되었는데, 2010년 현재 총자산 7234억 원에 매출액은 4499억 원을 기록했으나 부채가 6073억 원으로 재무구조가 좋지 못하다.
1987년 2월에는 한국 해외건설업 면허 제1호 및 오피스텔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도급순위 상위권의 종합건설업체인 고려개발(주)을 인수했다. 고려개발은 1965년 3월 31일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서 정천석이 설립한 기업이다. 1972년 5월에 네팔 카트만두시에 해외지사를 설치하고, 국내 최초로 해외건설공사를 수주했으며, 1978년 10월 30일에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교각의 높이가 90m인 그리크(Grik)교를 비롯해 험준한 고산지대를 관통하는 카라크터널(Karak Tunnel)공사 등을 마무리 했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오베로이(Oberoi)호텔공사 등을 수행했다. 국내에서는 경남 거제시의 고현만 일대 공유수면 34만 평을 자체기술과 자본으로 매립, 아파트·공공건물·상가 등을 건립해 조선공업기지 배후 신도시로 개발했다. 또한 국내 최초의 오피스텔인 고려아카데미텔을 시공 분양했고, 건설 관련 자재 개발에도 앞장서 다공성 아스팔트 혼합체인 투수콘을 개발했다. 그러나 1987년 1월 회사정리절차 개시를 신청하면서 같은 해 2월 28일에 대림그룹 계열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2010년 현재 총자산 1조1111억 원(부채 7554억 원)에 622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한 도급순위 38위의 종합건설업체다. 대림코퍼레이션 거대 기업으로 성장, 지주사 역할도 1994년 10월 1일엔 석유화학제품 국내외 판매와 화물운송 주선을 목적으로 (주)대림코퍼레이션을 설립했다. 설립과 동시에 싱가포르·중국·베트남·인도 등에 현지 사무소를 설치했고, 1996년 10월 대림산업 유화사업부의 내수영업 부문을 인수했으며, 1997년 1월에는 ‘5억 불 수출 탑’을 수상했다. 2001년 11월에는 한림상운을 인수해서 2003년 10월부터 DL Camellia, DL Iris, 이 Bellflower 등 대형화물선을 계속 취항시키고, 2008년 11월에는 대림H&L을 흡수 합병했다. 대림H&L은 플랜트 건설을 위한 거대한 철탑, 철구조물 또는 석유 시추를 위한 해상구조물 등 초 중량화물의 육상 및 해상운송 업체로 대림의 2세 경영인 이준용의 장남 이해욱이 전액 출자해서 자본금 10억 원으로 설립한 것이다.
대림코퍼레이션은 2010년 현재 자산 1조7774억 원에 매출액 3조3999억 원에 이르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해서 대림그룹의 실질적인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대림콘크리트는 1983년에 순천공장을 준공해서 PHC파일, PC파일, 전주 및 레미콘생산을 개시했으며, 1985년에는 안양공장(레미콘생산)을 준공해 사업영역의 다변화를 도모했다. 1991년 2월에 일본 Nippon Hume pipe와 기술 제휴, 1992년 용인공장을 준공해서 PHC파일을 생산하고, 1993년에는 이태리의 세계적 석재설비 전문회사인 Breton사의 기계 설비를 도입해 국내 최초로 인조대리석(미라톤)을 생산했다. 1996년 칠서공장(PHC파일) 준공과 함께 새한마텍(PHC파일)을 인수합병해서 마켓리더로 부상했다. 2009년에는 고려개발의 Steel사업소를 통합하면서, 상호를 대림C&S㈜로 변경, 고품질의 하이파일(hypile) 생산, 특수강교, 풍력발전타워, 수문제작 등 국내 최대의 철구조물 생산업체로 성장했다. 1995년 3월 29일에는 대림산업 정보사업부를 분리, 그룹 내 시스템통합(SI) 및 시스템관리(SM) 등 정보통신 업무를 전담하는 대림I&S(주)를 설립했다. 2002년에는 그룹 내 계열사인 아이씨트로를 합병하면서 계속 성장을 거듭해 2000년 약 1050억 원이던 매출액이 2009년에는 2118억 원을 기록해 두 배 이상 성장했다. 또한 같은 해 9월에 자본금 25억 원의 대림정보통신을 설립했다. 그 결과 대림그룹은 모기업인 대림산업, 대림C&S, 대림자동차공업, 대림코퍼레이션, (주)삼호, 고려개발, 대림I&S(주), 대림정보통신, 오라관광, 대림학원 등을 거느린 대규모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그러나 대림그룹은 비슷한 시기에 창업한 여타 재벌들과는 달리 주로 사업영역이 건설, 석유화학, 운수기계 등에 국한하는 등 비교적 단조로운 사업구조를 시현하고 있다.
구조조정과 건설 위주로 사업 재편 재계 서열 급상승 그 와중에서 대림그룹 내 사업구조조정도 잇따랐다. 첫째, 풍림산업(주)의 이탈이다. 동사는 1954년 10월 5일에 전일기업(주)으로 설립되었는데 1958년 삼광건설(주)을 흡수 합병해 1959년 1월 풍림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1978년에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76년 해외건설 사업 진출은 물론, 플랜트건설에도 참여하는 등 상위권의 종합건설업체로 성장했으나, 1981년 7월에 대림그룹에서 분리됐다. 이재준은 1939년 부림상회를 이석구와 함께 창업해서 대림산업을 공동 경영해 왔었는데, 동업관계를 청산하면서 풍림산업을 이석구 몫으로 분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대림통상이다. 대림통상의 모체는 1975년 11월 환금기업을 흡수 합병해서 탄생한 인천 기물공장이다. 같은 달에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으며, 1981년 12월에는 ‘5000만 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1986년 주안공장이 품질관리 1등급 인증을 획득한 데 이어 1987년 인천 기물공장이 Q마크와 품질관리 1등급 인증을 획득했으나, 1988년 6월 대림그룹에서 계열 분리됐다. 경상남도 창원시 양곡동 574의 대림요업(현 대림B&Co)은 1978년 12월 위생도기공장을 2차로 증설하고, 1985년 12월 위생도기공장 3차 증설을 완료했으며, 1990년 5월 타일 신공장을 준공했다. 1992년 9월 제천 위생도기공장을 준공하고, 같은 해 12월에 기업을 공개했다. 1996년 3월 합작 법인인 대림NAX(주)을 설립했으나, 1998년 3월에 대림통상으로 최대 주주가 변경됐다. 1997년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 작업의 일환으로 추정된다. 셋째, 대림그룹의 유일한 금융업체인 서울증권(현 유진투자증권)이다. 1954년 5월 서울증권(주)으로 설립되어 1987년 8월에 기업을 공개했다. 1989년 외국에서의 증권업 허가를 받았고, 1995년 외국환업무 지정기관으로 지정되었으며, 1996년 5월에 수익증권 판매 업무를 개시했다. 1999년 6월에는 한일투자신탁운용(주)을 인수했다. 2001년 선물업 및 투자자문업 허가를 받은 한편, 대림그룹에서 계열 분리됐다. 2002년 제일선물(주)을 인수하고, 2003년 방카슈랑스 업무와 투자일임업 등록을 했다. 2007년 3월에 유진그룹 계열사로 편입되면서 같은 해 12월에 유진투자증권으로 상호가 변경됐다. 2011년 현재 대림그룹의 계열사는 실질적인 지주회사역할을 담당하는 대림코퍼레이션을 포함한 총 24개 계열사에 자산총액이 13조4650억 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28위에 랭크됐다. 공기업을 제외한 순수 재벌순위는 18위다. 1939년 인천 부평역 앞에서 설립된 부림상회가 창업 72년 만에 이룩한 성과다. 계열 기업군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대림코퍼레이션과 대림산업, 대림C&S, 대림I&S, 대림자동차공업, (주)삼호, 고려개발, 오라관광 외에 부동산업체인 험프리에스엘큐원과 에이플러스디(주), 사업지원 서비스업체인 (주)웹텍코프 그리고 종합건설업체인 천안두정랜드마크프로젝트(주)와 포천파워(주), 전기, 가스, 증기 및 공기조절 공급업체인 송도파워(주), 하수, 폐수 및 분뇨 처리업체인 에코술이홀(주)과 청정김포(주), 사업시설 관리 및 조경 서비스업체인 공주환경(주), 육상운송 및 파이프라인 운송업체인 네오트랜스(주), 도매 및 상품중개업체인 (주)켐텍과 김해동서터널(주), 영천상주고속도로(주), GK해상도로(주), 서울문산고속도로(주) 등이다. 근래 들어 대림H&L과 만월산터널, 수도권서부고속도로는 계열 분리됐다.
과거에 비해 계열사 수는 엄청 불어났으나, 근래에 새로 편입된 계열사들이 절대 다수 건설관련 업체뿐이어서 사업내용이 종래에 비해 훨씬 단순화됐다. 또한 새로 편입된 계열기업의 경우 전부 1990년대 후반 이후에 설립되어 수익률도 신통치 못한데다가 더욱 주목되는 것은 근래에 신규 편입된 절대 다수 업체들의 자산규모가 매우 크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대림그룹의 재계 서열 상승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자본규모에 비해 고용효과가 극히 미미했는데, 이는 부동산관리 내지는 민자도로 등의 운영사업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편법상속, 부당 내부거래 등 경영권 3세 승계 주목 계속기업화 70여년 동안 대림그룹에는 영광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대림산업의 주업이 건설업 그것도 특히 관급(官給)의 토목사업인 이상 비리 소지는 상존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창업자 이재준이 경영하는 동안에는 별다른 잡음들이 없었으나, 근래 들어 편법상속, 부당 내부거래 등이 간혹 불거지곤 했다. 최근에는 경영권 3세 승계와 관련해서 대림그룹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2008년 대림H&L과 대림코퍼레이션의 합병한 것이 발단이었다. 대림코퍼레이션에 합병된 대림H&L은 애초 이해욱 부회장(이준용 회장의 장남)이 개인 돈 10억 원을 투자해 지분 100%를 보유한 사실상의 개인회사로 그룹 내 물량 몰아주기 등을 통해 순자산 330억 원의 규모로 성장했다. 그런데 대림코퍼레이션과 대림H&L의 합병으로 이 부회장은 0%였던 대림코퍼레이션 지분을 32.1%로 끌어올려 이준용 회장 다음으로 최대 주주가 된 것이다. 대림코퍼레이션은 2007년 매출액 2조458억 원, 당기순이익 744억 원을 올린 알짜회사일 뿐만 아니라, 모기업인 대림산업 지분 21.67%(754만1162주)를 보유한 최대 주주로 대림코퍼레이션→대림산업→기타 주력 계열사로 이어지는 출자구조로 되어 있다. 대림그룹 이준용 명예회장도 대림코퍼레이션(지분율 61%)을 통해 그룹을 장악하고 있다. 창업주인 고(故) 이재준 명예회장→이준용 명예회장→이해욱 부회장으로 이어지는 대림그룹의 오너 3세 경영권 승계가 사실상 마무리된 것이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