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태조부터 순종까지 27군주가 통치했다. 그런데 종묘에는 35위의 임금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에는 19위, 영녕전에 16위의 임금 신위가 있다. 여기에는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모셔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5군주가 안식하고 있는 이유는 추존 때문이다. 추존은 보위에 오르지 않았으나 사후에 임금이나 황제로 추조된 군주다. 조선은 왕실 사당인 종묘를 통해 효와 충 사상을 전파하고 있다. 조상을 정성껏 모셔 백성들로부터 효와 충을 유도하고, 나라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종묘대제는 나라의 제일 행사가 됐다. 이론적으로는 사직대제가 더 의미가 더할 수도 있지만 조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묘제례를 국가의 최고 대사로 행했다. 종묘에 모셔진 군주 중 최고 항렬은 목조다. 영녕전 정중인 제1실에 모셔진 목조는 실제로는 임금을 하지 못했다. 목조는 태조인 이성계의 고조부다. 태조가 3년(1394년)에 4대조를 추존할 때 ‘덕(德)을 베 풀고 의(義)로써 행하였다’고 하여 목왕으로 높였고, 뒤에 태종이 목조로 추존했다.
목조인 이안사는 전주 유력 가문의 자제로 성품이 호방하고 천하를 경략할 뜻이 있었다.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던 그는 스무 살 때 전주 지주사(知州事)와 사이가 멀어졌다. 지주사는 전주 안렴사와 함께 목조를 역적으로 몰아붙인다. 당시 유행하던 이씨가 왕이 된다는 목자왕기설(木子王氣說)의 주인공이 이안사라는 주장이었다. 그 근거로써 전주의 명산으로 왕의 기운이 서린 기린산 왕자봉 밑에 전주이씨 3세인 이천상의 묘가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이 묘의 후손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이 된다는 것이다. 목조는 가족과 자신을 따르는 170호와 함께 삼척으로 몸을 숨겨야 했다. 태조실록에는 목조를 따라나선 집을 170호로 표현했는데 전주군지에는 7000여 명이라고 되어 있다. 몇 만 명 되지 않았을 당시 전주의 인구와 급박했던 상황을 감안할 때 목조의 인품을 추앙한 백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목조는 삼척에서 피신생활을 한 지 1년 만에 아버지 이양무 장군의 상을 당했다. 목조는 아버지 묏자리를 구하려고 좋은 산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지쳐 잠시 나무 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길을 가던 한 도승이 한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옆에 있던 동자승에게 말했다.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 목조가 나무 밑에서 보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도승은 계속 말했다. “이곳에 장사지내면 5대 안에 왕이 태어날 자리인데 반드시 개토제(開土祭) 때 100마리 소(百牛)를 제물로 바치고, 금으로 만든 관(金棺)을 사용해야 한다.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
이안사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나라를 창업할 후손이 태어난다는 말에 고무됐다. 그러나 자신은 전주에서 삼척으로 피신한 처지로 관원에게 노출되면 안 되는 도망자 신세였다. 그러니 재정이 넉넉할 리 없었다. 삼척 준경묘·영경묘는 조선 왕조 태동의 발상지 목조는 궁리 끝에 ‘소 백 마리는 백우(百牛)이고, 백우(百牛)는 백우(白牛)와 음이 같다’ 하는 생각을 해냈다. 또 금으로 만든 관은 보릿대의 누런색으로 꾸밀 수 있음을 알았다. 목조는 처가에 있던 흰 소(白牛)를 가져오고 황금색으로 보이는 누런 보릿대로 관(金棺)을 만들어 장사를 지낸다. 목조는 장사를 지낸 후 다시 함흥으로 피신해야 했다. 갈등 관계에 있던 전주 지주사가 관동 안렴사로 부임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지를 하늘이 받아들여 5대째인 이성계가 왕에 등극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목조가 모신 아버지 무덤이 준경묘이고, 어머니 무덤이 영경묘이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두 묘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계속 허사였다. 왕실의 염원을 안 근거없는 꿈 등을 제시하며 묘를 찾았다는 허튼 소리를 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오랜 바람은 고종36년(1899년)에 이뤄졌다. 이양무 장군 부부의 묘를 찾아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했다.
강원도 지방문화재였던 준경묘와 영경묘는 2012년에 국가 문화재로 승격됐다. 2012년 7월 12일의 관보에 지정사유가 실려 있다. ‘준경묘·영경묘의 묘역과 재실, 목조대왕구거유지 등으로 구성된 삼척 준경묘·영경묘는 조선 태조의 5대조(목조의 부모, 즉 양무장군과 그 부인 이씨)의 능묘다. 비록 왕의 능침은 아니지만 조선 왕조가 인정한 선조의 묘역이다. 삼척 준경묘·영경묘는 남한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조선 왕실 선대(先代)의 능묘로서 조선 왕조 태동의 발상지로서의 역사성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적 가치 등 중요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