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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아티스트]김범수, 감성의 환기

얇고 가느다란 영화필름을 통한 무한변형의 치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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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37-338호 박현준⁄ 2013.08.05 13:48:15

김범수(48) 작품의 기본재료는 영화필름이다. 유학시절 버려진 영화필름을 발견한 이후 그는 한결같이 주된 재료로써 영화필름을 사용해 왔다. 미묘하게 변화하는 연속적인 평면 이미지의 구성은 3차원의 견고한 형태감을 지닌 조각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유연함이 있다. 화려한 색채, 다양한 패턴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구체적인 형상은 2차원의 평면이 보여줄 수 있는 회화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얇고 가느다란 필름이 지닌 무한한 변형 가능함을 강조하듯 치밀한 계산 아래 작품을 만들어간다. 손의 유희라고 보여질 만큼 재료는 파편화되지만 섬세하고 정밀한 수공적인 조합으로 인해 본래의 성질은 완벽히 감추어지고 작가의 작품만이 남게 된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듯한 계산과 구성은 재료 자체의 물성 혹은 고유성과 견고성과 전혀 무관하게 진행된다. 이제 작품은 오로지 김범수의 손과 몸짓의 흔적과 결과를 담게 되는 것이다. 인간 행위와 정신의 기록물이자 결과물인 영화필름은 어떠한 정보도 직접적, 즉각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필름 속의 이미지는 영화 본래의 주제, 의미와는 상관없는 문양처럼 다루어지며 또 다른 조형물로 탄생된다.

기법상으로 작가에게 필름을 자르고 붙이는 방법은 생산, 소비, 소멸이라는 영화필름의 이용과정을 역이용한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소멸된 이미지를 작가 나름의 방식으로 사용하여 새로운 창작물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생산으로부터 소멸, 다시 소멸에서 생산이라는 메카니즘 속에서 영화필름은 원료(原料)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작가에게 있어 영화 필름은 단순히 원료로서 의미를 넘어선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어떠한 기억과 감정을 환기하기를 바라며 또한 관객과의 교감이 세대, 매체, 시간, 지역을 초월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러한 관점에서 영화 속 이미지는 다양한 역사, 시간, 배경, 인간의 삶을 포착한 상징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영화가 지닌 특정한 주제를 자신의 주제로 연장하여 환기하고자 한다.

평면의 집적과 공간과의 조응 예를 들어 ‘감각의 제국’, ‘첫사랑’ 등과 같은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필름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자신의 작품에 이용한다. 따라서 작가에게 영화는 감정의 환기에 의한 결과물임과 동시에 감정의 환기를 이끌어내는 매개체인 것이다. 그의 작품이 영화에 대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텍스트를 제공하지 않으므로 영화를 보지 못한 관객들이 그러한 의도를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객은 서서히 영화필름이 드러내는 특정한 상황에 대하여 인지하게 되고 작품과 연계하여 인식하게 된다. 이렇듯 김범수의 작품은 작가가 만들어낸 거시적인 외관과 영화 속 이미지가 지닌, 미시적인 내연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혼합되면서 거대한 서사구도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기하학적 도상의 미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는 점에 있어서 다소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띄고 있기도 하다. 특히 최근 설치작품들에서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도상학적으로는 중심으로부터 뻗어나오는 여러 도형의 중첩은 마치 만다라 혹은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이 종교회화를 연상하게끔 한다. 실상 이러한 패턴은 작가의 의식이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보여주고 있기에 만다라가 보여주는 내면의식의 공간과 직접적으로 연결지을 수 있다. 영화 속 타인의 삶을 통해 진정한 작가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려는 그의 시도는 세계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보다 대의적인 차원으로 승화된다. 그의 작품은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그리고 물질세계와 비물질 세계의 혼합과 충돌이 일어남으로써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이끌어내고 있다.

특히 드로잉에서 보여지는 원형 유기체의 무한 확장은 작가의 분석적, 이성적 사고와 일상에서 느끼는 심리적 한계에서 벗어나 자아의 균형적인 통제, 우주와의 합일을 찾으려는 의식적, 무의식적 욕구라고 할 수 있다. 변화와 변형의 잠재성을 포용하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표현의 움직임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의 드로잉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외부세계가 철저히 배제된, 작가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작가의 중심을 만들어나간다는 차원에서 드로잉은 그의 모든 작업의 시작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패턴들은 작가와 외부세계와의 조화로운 관계를 창조해 나가는 상징을 의미하고 효과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작가가 3차원의 조형작업에서 발견하기 힘든 평면성을 추구하려 노력했다고 해서 그가 완전히 조각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평면의 집적과 공간과의 조응을 통해 조각적인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둥근 원형판의 반복과 확장은 크기와 두께가 함께 공간으로 팽창하고 있어 실제로 보이는 작품 너머 끊임없이 작품의 패턴이 지속되는 듯한 시각적 환영을 만들어낸다. 또한 정사각형, 직사각형의 구획으로 나누어진 작품 역시 구획 안의 문양은 그리드를 바탕으로 하여 제한된 공간을 벗어나 공간 속에서 발산된다. 더욱이 고유의 리듬감을 가진 형상에 빛과 그림자의 효과가 적절하게 부여됨으로써 작품의 물리적 크기와 인상은 달라진다. 이렇듯 작품이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과 유연하게 조응하는 방식은 김범수의 작품에 더욱 감각적이고 환상적인 효과를 부과하고 있다. 공간에 따라 장소특정적인 상황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면서 그의 작품은 관객들에게 보다 개인적이고 다양한 경험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고 있다. 김범수의 작품은 과거와 개인의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미래의 기억으로 승화시키는 장치로서 소통될 것으로 기대한다. - 류지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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