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 1860∼1939)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전환기 유럽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이다. 무하는 매혹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획기적인 구도와 서체로 엮어 독특한 스타일의 포스터를 만들어냈고, 이는 '벨 에포크' 시기 파리에서 새로운 장르의 시각 예술로 자리 잡았다. 'le style Mucha'로 불리는 이 스타일은 미술 애호가들이 집을 꾸미는 다양한 디자인과 장식품으로 널리 응용됐다. 1890년대 들어 포스터는 파리 시각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했다. 컬러 석판화의 발달과 벨 에포크의 상업 문화 속에서 광고에 대한 수요 증가 덕에 아티스트들은 새로운 예술 형태를 탐구할 기회를 얻게 됐다. 도시의 광고판들은 전시장이 됐고, 무하의 포스터는 섬세한 파스텔 톤과 신비스런 비잔틴 효과, 독특한 구성과 구도로 파리 미술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를 통해 무하의 스타일은 새로운 사상과 양식들을 싹틔운 세계적 미술 사조, 아르누보의 아이콘이 됐다.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아르누보는 1890~1910년 사이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양식이다. 그 중에서도 무하 스타일은 아르누보 시대를 대표하는 양식으로서 그가 창조해 낸 선적이고 장식적인 문양, 풍요로운 색감, 젊고 매혹적인 여성에 대한 묘사 등은 오늘날 아르누보의 정수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그는 기술력의 발달과 기계화를 추구하는 20세기 초반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예술을 일상생활 속으로 끌어들였다. 다량으로 제작된 그의 작품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두루 겸비하여 당시 아류로 치부되던 상업미술을 순수미술의 위치로 끌어올리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알폰스 무하는 상업적인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조국애와 민족애를 표현한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함으로써 진정한 대가로 거듭났다. 파리와 미국에서의 성공 이후, 1910년 무하는 그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30여 년 전 고향인 이반치체를 떠난 이래 줄곧 무하는 조국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려고 했다. 대중성과 예술성 가미 순수미술 경지 개척 앞선 10여 년 동안, 무하는 그의 야망이 담긴 20여 점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질 ‘슬라브 서사시’(The Slav Epic)작품의 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묘사한 작품을 통해 무하는 모든 슬라브 동포의 정신적인 통합과 그들과 함께 정진하여 모든 슬라브 국가의 공통된 목표인 정치적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격동의 근대 역사를 지닌 체코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꽃피운 그의 열정은 한국 근대 미술가들의 정체성과도 일맥상통한다. 전시에는 그가 19세기 말 프랑스 사교계의 아이콘이자 유명 여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를 모델로 그린 지스몽다, 까멜리아, 햄릿 등의 주옥같은 연극 포스터들이 소개된다. 또한 그에게 체코 국민화가라는 칭호를 선사해준 슬라브 서사시 연작을 통해 무하의 깊은 민족애도 엿볼 수 있다.
1918년 세계 1차 대전이 끝나면서 체코슬로바키아가 건국됨에 따라 그의 꿈이 현실이 됐다. 무하가 그토록 바라던 슬라브 민족의 통합은 이제 인류애로 확대되어 그는 이 주제를 탐구하며 남은 생애를 보냈다. 특히 그의 삶이 마지막 단계에 또 다른 전쟁이 유럽을 강타할 즈음에는 새로운 3부작 제작에 착수했다. 비록 이 작품이 1933년 그의 죽음으로 더 이상 진행되진 못했지만, 현존하는 습작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인류가 지닌 세 가지 특징인 이성, 지혜, 사랑으로 인류가 진보와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무하의 유토피아적인 사상을 전달하고 있다. 9월 22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알폰스 무하:아루누보와 유토피아'전은 우리에게 체코와 유사한 정치 사회적 혼란을 겪었던 근대 한국사를 되새기며 나아가 혼돈의 시대 속에서 진정성 있는 예술가로서의 자세란 무엇인지 되짚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 왕진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