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프랑스 파리 외곽의 마굿간에서 생활하던 김창열(84) 화백은 "이른 아침 세수를 하려고 대야에 물을 받다가 흘러내려 캔버스에 크고 작은 물방울이 튀었다. 캔버스 뒷면에 뿌려진 그 물방울들이 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이 나는 그림으로 보였다. 그때부터 시작하게 됐다"고 물방을 작업의 계기를 회상했다. 김 화백의 물방울은 화면 가운데 군집을 이루기도 하고 화면의 가장자리에 밀려 떠오르기도 한다. 물방울이 흘러내려 긴 자국을 남기면서 아랫부분에 가까스로 맺힐 때도 있다. 40여 년을 물방울만 반복해서 그렸지만 "지루하지 않다"고 말한다. "조금씩 변하기는 했지만, 물방울 외에는 다른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원로 작가인 김창열 화백의 전 시대 작품을 망라하는 전시가 8월 29일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막을 올린다. 물방울 연작이 시작된 1970년대 초중반부터 1998년 작품까지가 전시되는 본관에서는 작품의 완성도가 가장 무르익기 시작했던 시기의 걸작 10여점이 걸렸다. 작가로서 전성기를 맞이하는 40대 시절인 70년대와 80년대, 세계무대에서 주목 받으며 활동한 그가 한 점 한 점 찍어낸 물방울들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영롱한 빛과 생명력을 내뿜는다.
작품 200점 제주도 기증, 미술관 건립 협약 김창열 화백은 '회화'에 무섭도록 천착한 화가이다. 작품 세계의 정체성을 정립한 가장 중요한 시기는 그가 뉴욕에 머물렀던 1965년부터 1969년 사이다. 팝아트가 유행하고 하이퍼리얼리즘이 두각을 드러내던 초기 1960년대 말, 그는 '서정적 추상'으로 작품 정체성의 방향을 잡는다. 당대 화단의 영향을 받은 기계적이고 반복되는 형태의 배열,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청소년 시절 주머니가 텅 빈 채로 북한에서 월남하던 기억이자 전쟁의 고통이었다.
80년대 접어들며 김 화백은 캔버스가 아닌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친 표면이라는 물체의 즉물성을 살리는 반면, 이러한 표면에 맺힐 수 없는 영롱한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로써 물방울이 실제로 지니고 있는 물질성을 상실하게 된다.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마대 자체를 여백으로 남겼던 초기와 달리 한자체나 색점, 색면 등 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동양의 정서를 끌어들였다. 물방울 역시 70년대의 투명한 물방울과 달리 색채가 들어가 입체감이 도드라진다. 90년대에 접어들며 '회귀'(Recurrence)시리즈가 등장한다. 김 화백의 최근 작품의 시작을 엿볼 수 있는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인쇄체로 또박또박 씌여진 천자문을 배경으로 투명한 물방울들이 무리 지어 화면 전반에 흩어져 있다.
마치 물방울들이 바닥에서 스며 나왔다기 보다는 화면 밖에서 흘려진 듯한 형태를 띠고 있다. 천자문을 비롯해 한적(漢籍)등의 글자들은 화면에 구성적인 요체로 자리 잡아 역사적 흔적으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이는 현실의 물방울과 어우러져 시공을 초월한 조화로움을 표현한다. 김 화백이 한문에 집중한 것에 대해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다. 신문지위에다 붓글씨를 쓰며 익히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향수가 남아있다"며 "영어냐 한자냐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그것 조형성이 맘에 들어 한자를 택했다"고 천자문을 물방울 배경으로 사용한 이유를 설명했다. 2000년에 들어선 그의 작품은 채도가 높고 적극적인 색채와 형태의 변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5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물방울을 그려온 김창열의 작품을 보면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으나 그 영롱함과 투명성을 늘 한결같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방울이 상징하는 관념적 의미가 매우 절대적이며 순수에 대한 김 화백의 집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오는 9월 25일까지 계속되는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화업 50년사 개인전은 지난해 11월 국립타이완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 이후 국내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이자 '물방울'연작의 시작부터 최근작까지 선보이는 다시 없을 기회로 여겨진다.
특히 국내에서 김창열의 초기 작품부터 근작까지 보는 것은 2009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이후 처음이며 총 40여점의 전시작 대부분은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한편, 김창열 화백은 자신의 작품 200여 점을 제주도에 기증하며 미술관 건립 협약을 맺었다.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남겼던 작품들을 가족과의 상의를 통해 개인보다는 미술관에 걸어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라고 한다. "너절하지 않은 화가로 기억되고 싶다. 있으나 마나 하는 것이 너절한 것이 아닌가" 이북에서 월남해 1년 여간 제주도에서 피난 생활을 한 김 화백에게 제주도는 제2의 고향인 셈이다. 최근 손 떨림 증상으로 그림 그리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고령에다가 전립선암 수술 때문이다. "양손을 다 쓰는데 손이 떨리면 한 손으로 받치고 그림을 그린다. 젊었을 때보다는 필력이 달라졌다"고 웃는다. 자신의 오랜 업을 서서히 정리하며 한국 미술사의 대가이자 역사로서 기록되어가는 그에게 이번 전시는 더 큰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 왕진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