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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종묘스토리 - 22]미래를 아는 환조 아들은 왕이 되다

태조의 아버지 이자춘, 환조의 가업은 나라의 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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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42호 박현준⁄ 2013.09.02 15:07:19

“제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이달충이 환조에게 자신의 아들을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환조는 태조의 아버지인 이자춘이다. 아버지 환조는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이달충은 “귀랑(貴郞)은 참으로 비범한 사람입니다. 공(公)께서도 아드님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공의 가업(家業)을 번창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드님일 것입니다.” ‘공(환조)의 가업’은 나라의 창업을 의미했다. 이달충은 태조가 임금이 될 것이라고 환조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이달충은 동북면을 순시하다가 태조를 헐뜯는 이의 말을 들었다. 이에 태조를 불렀다. 사실여부를 확인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태조를 보는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뜰에 내려와 영접했다. 태조의 위엄에 압도당한 것이다. 환조는 자식을 후하게 대접한 이달충이 서울로 돌아갈 적에 환송연을 베풀었다. 환조가 잔에 술을 부어 돌리니 이달충이 서서 받았다. 그런데 태조가 잔에 술을 부어 돌리자 그는 무릎을 끓고 마시었다. 환조는 괴이 여겨 연유를 물으니 왕기(王氣)를 느낀 그가 자신의 후손을 부탁하는 에두른 표현을 한 것이다. 태조의 왕기는 환조의 승부수에서 비롯됐다. 7, 8세부터 보통 아이들과 다르게 총명했던 환조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말 타고 활쏘기에 일가견을 자랑했다. 천호를 물려받자 군사들이 받들어 모셨다. 동북면의 군사 실력자가 된 환조는 원나라 땅이 된 쌍성총관부를 99년 만에 고려에 귀속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공민왕은 1356년 5월에 밀직부사 유인우에게 쌍성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인우는 쌍성과의 거리가 2백여 리에서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했다. 이에 왕은 환조에게 쌍성에서 유인우의 군사작전에 내응하도록 했다. 환조는 명령을 듣고 즉시 군사들의 입에 헝겁을 물리고,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소리가 나지 않게 하면서 은밀하고 신속하게 행군, 유인우 병사와 더불어 쌍성을 함락시켰다.

태조의 왕기는 환조의 승부수에서 비롯 이로써 고려는 화주·등주·정주·장주·예주 고주·문주·의주와 선덕진 원흥진·영인진 요덕진·정변진 등 여러 성과 함주 이북의 합란·홍헌·삼살의 땅을 수복했다. 왕은 환조를 승진시켜 대중대부 사복경으로 삼고, 개경에 저택을 선물하고 거주하게 했다. 환조는 1년 전 자신의 인생과 가문의 명운이 달린 중대결정을 한다. 원나라 지방관에서 고려의 신민이 된 것이다. 당시 원나라는 중서성 요양성·정동행중서성 등 고려의 동북지방과 만주지방에 위치한 3성의 원주민과 이주민을 분간하여 호적을 작성하려고 했다. 이는 원주민을 우대하고 이주자를 돌려보내는 정책이었다. 이주민을 배경으로 세력기반을 구축한 환조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대륙에서 원명교체기에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된 것을 기회로 반원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은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와 연결된 친원 기씨세력(奇氏勢力)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지역기반 세력가인 환조와 손잡을 필요성이 절실했다. 결국 고민하던 환조는 1355년(공민왕 4)에 공민왕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동북면 군사실력자에서 개경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는 일대 결단이었다. 환조는 개경에 머무른 지 1년 만에 동북면에 돌아가 4년 만에 병사했다. 그의 죽음을 공민왕은 깊이 애도했고, 사대부들은 “이제 동북면에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였다.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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