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3호 이성호⁄ 2013.09.09 14:17:23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어른이 된 후에 알게 됐습니다” 이대건(47, 이대발춘란 대표) 대한민국명장은 어린 시절 가난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과자와 껌팔이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엿 볼 수 있었다. 가난 속에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접한 ‘농업’ 교과서였다. 그의 어릴 적 별명은 ‘초록이’였다. 초록색을 너무 좋아했기에 농업이 적성에 맞았던 것이 아닐까? 국내최고의 난 스승을 찾아 타 과목과 달리 농림·축산·원예 시험에서는 언제나 100점을 받았고 이를 눈여겨본 농업 선생님이 농업고등학교에 진학을 권유했다. 부모님이 공업계 혹은 인문계를 원했지만 그는 대구농고 진학을 결심하고 전공으로 원예를 선택했다.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하니 소풍가는 마냥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물론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고2때 ‘우수 농고생’으로 뽑혀 100만원의 정부지원금을 받아 흑염소 7마리를 키우기도 했다. 고3때는 흑염소 대신 한우를 키웠고 원예종묘기능사자격증도 취득했다. 1988년 방위병으로 입대했고 사령관 관사의 원예병으로 복무했다. “사령관 숙소 정원의 난과 분재를 담당했는데 상관이 난을 죽이면 영창을 보낸다고 겁을 주기에 살기 위해서(?) 관련 책을 사서 보며 원예공부를 많이 했습니다(웃음). 죽어가던 난도 이 상병이 관리하면 살아난다는 칭찬을 받았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난’을 미래의 업으로 삼을 생각을 했습니다” 제대 후 24살, 조그마한 가게를 차렸다. 군 시절 실력만 믿고 창업했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때 첫 실패를 겪었다. 특히 고객에게 “난을 너무 모른다. 나한테 와서 배워라”라는 말까지 듣자 바로 가게 문을 닫고 난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그러다가 국내최고의 스승을 찾아다니게 됐다. “난계의 대가로 알려진 정정은 선생님에게 배우고 싶었지만 섣불리 찾아가면 받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나름대로 궁리를 짜냈습니다” 먼저 정정은 선생님이 볼링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듣고 바로 볼링장에 취직했다. 볼링장에 정 선생님이 오면 먼저 자리를 마련해주고 VIP로 모셨다. “6개월이 흘러 낯을 익혔을 무렵 난 관련 책을 들고 일부러 선생님과 부딪쳤습니다.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자네가 왜 난초책을 가지고 있느냐면서 깜짝 놀라시더군요. 선생님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제자가 돼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난 분실로 도둑 누명까지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제자가 됐지만 가르침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선생님은 제대로 된 기술은 가르쳐주지 않고 몇 달간 돌만 씻도록 했다. 힘이 들기도 하고 기술은 언제 배우나 하는 생각에 막대기로 돌을 휘 젓고 있다가 선생님으로부터 크게 혼이 났다. “스승이 그렇게 할 거면 집에 가라고 불호령을 내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돌이 반이나 닳을 때까지 씻고 또 씻었습니다. 나중에야 돌이 뾰족하면 뿌리에 상처가 나 결국 난이 병들게 돼 돌 세척이 대단히 중요하단 것을 알았습니다” 차츰 정 선생님에게 신임을 얻어 난초 감별과 키우는 법을 배우고 고객도 관리하게 될 무렵 사고가 났다. 단골이 맡겼던 700만원 상당의 난을 도둑맞은 것이다. 난 주인이 이대건 씨를 도둑으로 몰았고 쫓아낼 것을 요구해 결국 억울하게도 난가게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개의치 않고 손님자격으로 계속 출근, 오히려 30분 먼저 나가서 스승을 기다렸다. 본체만체하던 스승도 결국 보름이 지나자 “너 같이 지독한 녀석은 처음이다. 난 값은 물어줬으니 다시 나와라”라고 했다. 이대건 대표는 최근 분실된 난 주인을 다시 만났고 3년 전 훔쳐간 범인도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에 난이 없어지자 스승도 내가 훔쳐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제 끈기에 스승님이 마음을 열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낌없이 본인의 기술을 전수해 주셨습니다” 최고의 난 전문가가 되라는 가르침을 받고 1995년 결혼과 동시에 스승의 곁을 떠나 창업을 하게 된다. 스승은 제자하고 한 업에 같이 종사하면 안 된다며 창업자금과 기자재 등을 대주고 업계를 떠났다. 중국산 감별법 가르쳐주다가 살해 위협 특히 제자에게 앞으로 꼭 명심할 것이 있다고 했다. 첫째 난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할 것, 둘째 신용을 목숨처럼 여길 것을 주문했다. 이 2가지는 지금까지 이대건 명장이 지켜오고 있다. 4평 남짓한 차고를 빌려서 시작한 사업은 번창했다. 당시에 이미 그에게 마땅한 경쟁상대가 없었던 것으로 25평 규모의 건물로 확장·이전했다. 그러나 옆 신축건물 화장품가게에서 인테리어를 하면서 시너 냄새가 흘러들어와 난이 모두 죽었다. 더군다나 중국산 춘란이 값싸게 국내에 유입되면서 원산지가 국산으로 바뀌는 등 고난이 다시 시작됐다. “보증금 2500만원만 겨우 받아서 주변야산으로 비닐하우스 하나를 얻어 살았습니다. 하지만 돈을 아끼려고 직접 지은 비닐하우스가 바람에 날아가 돈을 빌려서 새로 지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그곳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나가라고 해 쫓겨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중국발 원산지 둔갑이 심각했다. 정품을 파는 곳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정직하게 우리의 것을 고집한 그는 가게마다 돌아다니면서 “원산지를 속이면 함께 다 죽는다”며 1인 시위를 하고 다녔지만 욕만 먹고 중국산 감별법을 가르쳐주다가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다. 절망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던가. 2002년 이대건 씨의 열정 그리고 기술을 지켜본 한 애호가가 선뜻 손을 내밀었다. “제 모습을 지켜본 애호가가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이리 일이 안 풀리냐 안타까워하면서 투자를 하겠다고 억대의 돈을 쥐어줬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난계에는 정설·정론이 없으니 반드시 한국 난을 체계화 시켜야 한다고 부탁하며 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것을 권유하더군요”
농업1호 대한민국명장 칭호 받아 이대건 대표는 충실하게 약속을 지켰다. 원래 탐구열이 높았던 그는 구미1대학 원예조경과를 마치고 대구가톨릭대에 편입한 뒤 조직배양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특히 춘란의 DNA분석을 통한 한·중 원산지 판별법으로 국내 동양 난 농가에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따냈다. 샘플 채취를 위해 중국 산골에 숨어들어가 목숨을 걸고 난을 캐왔고 제주도~ 울릉도까지 전국을 돌며 채취한 국산과 비교해 데이터화해 표준을 만든 것이다. ‘춘란 품종에 대한 SSR DNA마커의 복합유전자형 결정과 운용’이라는 논문은 난으로는 처음으로 SCI논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난에 관한한 최고의 경지에 오른 그는 난의 꽃대에서 새로운 촉을 생산하는 방법의 일종인 ‘호에서 중투로 발전시키는 키메라 원리’를 개발했고 이 기술을 공개해 이른바 난 업계를 평정시킴은 물론 난인들에게 큰 인심을 얻게 됐다. 강의에 나섰고 사이트 구축과 아카데미도 만들었다.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연구 자료들을 전국의 난 애호가에게 제공했다. 특히 국내외 난 경연대회에서 수차례 입상을 했고 지난 2007년 아시아태평양 세계난전시대회에서는 최연소 동양란 심사위원장을 역임하기에 이른다. 그해 임업분야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 한국 춘란에 최초로 33개의 차트를 고안해 내 표준화 작업을 완성했고 난에 대한 22개의 매뉴얼을 개발, 난 심사표준자료를 만들었다. 현재 이대발 난 아카데미를 통해 12년째 한국형 신재배기술을 전국 농가에 보급하고 무료로 품종을 분양하고 있다. 신품종개발에도 나서 한국 난 업계에서는 전무후무하게 39개의 신품종을 등록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고용노동부·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최초로 대한민국 농업명장으로 선정됐다. 올해에는 ‘우수숙련기술인 국민스타’ 3인방에 뽑혀 롤모델로서 능력중심의 사회 구현에 앞장서고 있다. 이대건 명장은 죽음의 위기도 맞았었다. KV 증후군으로 사망진단 후 소생한 것. 폐에 물이 차 병원에서도 살수 없다고 했지만 기적적으로 일어났다. 부인도 큰 병에 걸려 너무 힘들다며 업계를 떠나고 싶다고 홈페이지에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자 “난 업계에서 누굴 믿어야 하나”며 십시일반 후원금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들 덕에 다시 시작할 계기를 마련했다. 결국 명장이 돼서 후원인들에게 보답했다. 많은 지인들이 도와주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열심히 살고 학구열이 높은 모습을 좋게 본 것 같다고 겸손해 했다. 그는 스스로 오뚝이 인생이라고 말한다. “좌절을 많이 겪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잘못해서 쓰러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타인 그리고 경험 미숙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어떻게 보면 운명으로 받아드린 부분도 있습니다” 이대발춘란 대표로서 사훈은 ‘신용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정했다. 죽음의 위기에서도 재기…오뚝이 인생 지금 것 도와준 많은 분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약속을 지켰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다짐이기도 하다. 명장이 되고 보니 꿈과 목표가 더욱 커졌다는 이대건 명장. “명장이라는 칭호를 받기 전에는 지금 모습의 절반만 돼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재 꿈의 3배를 이룬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꿈은 국내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우고 이를 토대로 한국 춘란을 들고 유럽에 진출하는 것입니다” 현재 국내 동양난 시장에서 한국 춘란의 점유율은 미미한 수준이다. 99%가 넘게 대만·베트남 등지에서 들어온 난이 점령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춘란은 색상과 화형(꽃의 형태)이 예쁘다. 이에 미국이나 유럽인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차원에서도 한국 춘란을 대량으로 개발·보급해야 합니다. 나는 춘란시장을 지켜내라고 명장이라는 국가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책임과 의무가 한층 더 커졌습니다. 애호가들만의 점유물이 아닌 춘란의 대중화를 실현하고 국제화를 꾀하는 것이 나의 남은 임무이자 목표입니다” - 이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