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4-345호 박현준⁄ 2013.09.16 10:57:31
미술작품을 왜 봐야 하는 거지? 먹고사는 문제도 아닌데 꼭 그림을 봐야하는 이유가 있을까? 어쩌면 당연한 이 질문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인 것 같다. 좋은 노래를 듣고, 멋진 풍경을 선호하고, 가을이면 시를 한편 읽는 것처럼 미술작품도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영양제 같은 거라고 답한다 한들 얼마나 와 닿겠는가. 사실 미술은 애써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발길 닫는 대로 봐야하는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내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단지 처음 맞닥뜨린 난해함과 당황스러움만이 강하게 남기 때문에 미술작품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것으로 각인될 뿐이다. 누구에게나 처음의 기억은 있다. 처음 운전대를 잡았던 날, 첫 출근의 긴장감, 첫사랑의 떨림처럼, 처음이라는 순간은 늘 여운과 추억을 남긴다. 아마도 설레고 순수했던 만큼 미숙했기에 아쉬움과 애틋한 감정이 오래 남기 때문 인 것 같다. 필자에게도 잊지 못 할 그림이 한 점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것이 아마 나의 미술작품과의 첫 대면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무렵, 난생처음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곳에 가게 됐다. 그곳에서 나는 이름 모를 노동자의 남루한 작업복만 덩그러니 그려진 그림 한 점을 보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13살 아이가 작품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릴 리 만무했다.
감동이라기보다는 그저 슬픔, 연민, 미안함, 두려움과 같은 감정만 뒤섞인 충격에 가까운 파장만이 눈가와 가슴으로 밀려왔다. 부끄럽게도 시간이 흘러 미술을 전공하게 되고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갖고 나서야 다시금 그 작품에 대한 향수가 떠올랐다. 작가의 이름도, 작품의 제목도 알 수 없었지만 작품 속 작업복 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던 ‘330’이라는 숫자는 기억에 선명하게 떠오르게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검색에 330이라는 숫자를 넣으니 20년 전 마음을 강하게 후려쳤던 그 어두운 그림이 눈앞에 나타났다. 황재형(61) 작가의 ‘황지330’이었다. 작업복의 주인은 1980년 황지탄광에서 갱도 매몰 사고로 사망한 광부 김봉춘씨의 작업복이라고 한다. 주인을 잃은 작업복은 14년 후 어린 소녀에게 묵직한 삶의 파편을 맛보게 했고 그로부터 20년이지나 여전히 미숙한 젊은이에게 다시 한 번 밀도 높은 고통 하나를 얹었다. 살면서 하나쯤 ‘예술 스타일’ 갖는 건 좋은 일 이후로도 내 마음에 남는 그림들은 많았다. 이제와 면밀히 보자니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들이 많다. 삶의 단면을 무심하게 재현하고, 고독과 상실감, 단절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첫 경험이란 이런 게 아닐까? 무지하고 불완전한 상태에서 경험하는 감정의 진폭 같은 것. 처음의 강한 떨림은 반복되는 패턴 안에서 이내 잦아들지만 늘 처음의 그것을 기준으로 꿈꾸고 그리워하고 답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아지면서 여물지 않은 감정의 잔가지들은 쳐내고, 미숙함에서 오던 실수를 바로잡아 가다보면 사람들은 그것을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한 사람의 운전 습관, 연애 패턴, 일하는 타입 등은 그 사람만의 스타일로 불리며 타인으로부터 구분 짓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음악을 듣는 취향, 선호하는 영화처럼 미술 작품에 대한 취향도 각기 다양하게 갖고 있는 것 같다. 미술작품 감상에 대한 나의 첫 경험처럼, 누군가는 만화책을 뒤적거리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전율을 받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백화점 외벽의 대형 설치물에서 미적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렇게 조우한 미술작품에서 팝아트를 선호하는 사람으로, 개념미술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근대의 풍경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것은 획일화 된 대중문화에 편중되어 있는 것보다 발전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하나쯤 ‘내 스타일’ 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자면 많은 감상과 이해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비싸지 않은 프린트나, 아트 상품이라도 내 맘에 드는 작품을 사보기도 하고 후회해 보기도 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만의 색깔을 찾는 것은 비단 창작자만의 숙제는 아닐 것이다. - 고경 산토리니갤러리서울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