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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 주목작가 - 정종기]상실, 부재의 메시지…정종기의 <TALK>

침묵을 그려 우리 시대의 가치부재와 영혼상실 일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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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48호 박현준⁄ 2013.10.14 13:23:07

여성의 뒷모습 그림으로 유명한 정종기 작가의 17회 개인전이 리서울갤러리에서 10월 16일부터 29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talk-nature’로 명명되며 작가가 일관되게 추구했던 현대인의 실존적 자아에 대한 회화적 서술이 계속된다. 정종기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얌전히 빗었거나 아래를 묶었거나 늘어뜨린 머리채에다 어깨에 가방을 걸친 앳된 소녀들의 뒷모습을 담고 있다. 그림 속의 소녀들이 바라보는 전방에는 사라져간 희미한 꽃잎들이 점점이 있거나, 형해로 변한 희뿌연 군중들, 끊겨진 한강철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공간이 휑하니 펼쳐진다. 작중 인물들은 과거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이를테면 머나먼 기억의 나라, 부재의 나라, 무(無)의 세상을 무심히 바라본다. 그들은 모두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얼굴이라 해야 가냘픈 뺨과 가녀린 귀가 전부다. 소녀들은 짝을 가려 나란히 서있거나 마주 서있거나 꽃을 들었거나 대지에 앉아있다.

화자(畵者)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치밀하고 정교하게 그리면서 한결같이 뒤만 그렸다. 앞을 그리지 않은 건 의도가 있어 보인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보는 사람의 감동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무언가 속내를 말하기 위해서 그렸음이 틀림없다.(중략) 그렇지만 늘 같이 지내온 터여서 그가 찡그린 뜻이 뭔지는 대강 알 수 있다. 그림과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정종기의 소녀들을 보면, 어떤 의도에서 그가 소녀들의 앞모습이 아니고 돌아선 모습을 그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그가 그린 뒤돌아선 소녀들은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또한 동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체험한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는 이미지의 주인공은 대개가 어린 소녀들이고 때론 소년들이지만, 왜 어린 주인공을 등장시켰는지는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 자연의 품에서 뛰놀고 꿈꾸며 한참 자라야 할 때, 사회적으로 급증하고 있는 결손가정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온갖 사교육장으로 내몰려 꿈을 상실한, 우리 시대의 희생자들이라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중략)

그가 그리는 모순은 아름다운 모순 작가 정종기 역시 소녀상을 빌려 실존의 상실을 말한다. 그는 실존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소녀들을 그린다. 상실한 소녀들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허망한 흔적의 세계를 바라보는 걸 극적으로 그려낸다. 그의 그림은 상실한 우리 시대의 인간상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부재의 세계를 조우시킨다. 그의 ‘TALK’는 부재와 상실을 동시에 앓고 있는 우리 시대의 세계상과 인간상의 단면을 오버랩함으로써 그 실상을 보다 명징시킨다.(중략) 머리칼은 물론 어깨와 허리에 걸치고 있는 백이나 복장을 건실하고 치밀하게 그렸을 뿐 아니라, 배경은 배경대로 소멸된 잔해와 흔적들을 리얼하게 부각시켰다. 그가 그리는 인간상과 세계상은 어딜 보아도 현실 그대로 리얼한 것들이다. 그는 이것들을 빌려 철저하게 상실된 인간들과 부재의 세계를 폭로한다.

그의 근작들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더 높은 단계의 메시지를 전한다. 상실과 부재의 연장선상에서 침묵이다. 침묵은 언어를 상실한 자의 표정이다. 언어를 상실한 건 상실과 부재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비탄과 충격은 그 또는 그녀를 빼앗겨 그들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상실과 부재는 침묵으로 이어진다. 정종기의 소녀들이 그림 속에서 뭔가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실상 무거운 침묵 속에서 부동(不動)하는 그림자로 읽힌다. 차갑고 굳어 있다. 생기가 없다. 물화(物化)되었다. 소녀들이 간직해야 할 영혼(아우라)이 실종되었다. 상실의 극치이고 부재의 극치 같다. 침묵을 그림으로써 정종기는 최종 우리 시대의 가치 부재와 영혼의 상실을 말한다. 그의 ‘TALK’는 상실과 부재에 대한 헌사다. 토크가 없는 토크다. 말이 토크지 토크가 아니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게 바로 우리 시대의 실상이 아닌가? 작가는 모순을 빌려 우리 시대를 이야기한다. 일반이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치밀하고도 아름다운 필치와 색조, 일견 상식적인 그림양식을 빌려 모순을 그린다. 그가 그리는 모순은 아름다운 모순이다. 요즘 정종기의 그림이 이것이다. - 글·김복영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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