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교육인가. 성실교육인가. 사람은 분위기에 휩쓸리고 사회는 트렌드에 빠지기 쉽다. 학습에 관련한 트렌드는 창의성이다. 어떤 주제이든 ‘창의’라는 표현을 해야 그럴듯하게 보인다. 역설적으로 세상이 창의성으로 획일화하는 느낌이다. 창의성을 내걸지 않으면 뭔가 모자란 듯한 느낌이다. 모든 사람이 창의성이 있어야 할까. 모든 일이 창의적이어야 할까. 아니다. 모두 다 창의적이면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다. 사회는 창의적인 사람과 기존 방식을 고수하고, 답습하고 계승하는 사람이 모두 필요하다. 교육은 성실성이 우선해야 한다. 그 다음에 창의성을 논해야 한다. 창의성 못지않게 좋은 제도의 답습도 사회발전과 개인의 행복을 안내한다. 청소년 일탈행동과 관련, 습관적으로 인성교육 부재를 외친다. 학생들이 술 마시고 싸운다면 인성교육이 잘못됐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인성교육은 인격(人格) 교육과 성격(性格) 교육을 모두 포함한다. 싸우고 책임지지 않는 행동은 인격 교육에 해당한다. 성격교육은 재능교육이다. 절대 다수 청소년들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안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구분하고, 행동한다. 그렇기에 일부의 무분별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학교의 인격교육은 무난한 셈이다. 그러나 성격교육, 즉 잠재 능력을 구현하는 재능교육엔 고개를 흔드는 사람이 많다. 유치원부터 영어, 수학, 국어 등을 모두 똑같이 경쟁적으로 공부하는 상황에서 개성은 드러나기 쉽지 않다. 인격교육보다는 재능교육 부실이 더 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해 성실교육과 창의교육을 모두 실현한 것은 고무적이다. 임금은 젊은 두뇌가 마음껏 공부할 여건을 마련했다. 또 장기 근무를 하도록 했다. 수재가 성실하게 연구해 업적을 내는 구조를 만들었다. ‘택문신유재행연소자충지(擇文臣有才行年少者充之).’ 세종이 2년(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면서 한 말이다. 젊은 두뇌를 모으라는 것이다. 세종은 나라의 장래를 행실이 바른 젊은 인재들로 보았다. 이들이 연구에 매진할 공간을 생각했다. 임금의 정치와 학문에 대한 자문을 해줄 인재를 육성하고 싶었다.
조선 초기에 서적과 연구 기관으로 수문전, 보문각이 있었으나 유명무실했다.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이 오직 관직만 주는 형태였다. 연구 과제가 없기에 성과도 나올 리 없었다. 세종은 이에 수문전을 폐지하고 보문각을 집현전으로 바꿔 명실상부한 국립연구기관으로 승격시켰다. 사무실을 대궐 안에 두고, 젊은 문관을 계속 발탁했다. 집현전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 자리다. 국왕이 조회와 정사를 보는 근정전과 사정전과 이웃해 있다. 집현전에 대한 임금의 관심이 반영됐다. 연구원은 10명으로 출발해 32명까지 늘었다가 18년(1436년)에는 총원 20명으로 확정됐다. 임금은 학자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해 각종 서적을 지원했고, 연회를 베풀고, 귤을 하사하기도 했다. 진상품인 귤은 제주도에서 올라오거나 일본의 사신이 바쳤다. 대략 한 번에 1000개 정도가 올라왔다. 임금은 귤을 조상의 영혼을 모신 종묘의 제수로 쓰고, 왕실 가족이 맛보게 했다. 또 명나라나 여진의 사신이 오면 접대하기도 했다. 이처럼 귀한 귤을 임금은 집현전에도 보낸 것이다. 국가차원 지원, 훈민정음 등 편찬 주도 집현전은 세조에 의해 강제 폐지될 때까지 37년간 존속했다. 이 기간에 96명의 학자가 재직했는데 모두 문과 급제자였다. 이들은 세종이 부여한 임무인 독서, 학문연구, 정책 자문, 서적 편찬 등을 왕성하게 해냈다. 50여 종의 책을 냈고, 수백 종의 정책 자문서를 작성했다. 대표적 편찬물은 고려사, 농사직설, 오례의, 팔도지리지, 삼강행실, 치평요람, 동국정운,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등이다. 특히 조선의 최고 작품인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연관된 용비어천가 주해, 사서언해의 편찬을 주도했다.
세종은 젊은 학자들을 대거 등용하고, 적극적인 지원으로 조선의 문화를 크게 꽃피운 것이다. 연구원들은 문화창달의 주역으로서 자부심도 높았다. 공부를 통해 선비의 길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다. 조선문화의 황금기를 연 집현전 역사는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학문 수련기다. 집현전의 기능이 정리되는 가운데 학자들은 학문 수련에 적극 나섰다. 경연관, 서연관, 종학교관으로서 임금과 세자 종친의 교육을 담당했다. 또 문서 작성과 사신접대를 통한 외교활동을 했고, 과거시험도 주관하고 풍수학도 연구했다. 다음은 문화 활동기다. 세종 10년에서 18년까지로 집현전 인원도 32인까지 늘었다. 기존의 기능 외에도 유교사회 건설을 위한 옛 제도연구와 편찬사업이 왕성했다. 세종이 관심을 크게 보인 치평요람, 자치통감훈의, 태종실록, 효행록, 삼강행실 등이 편찬돼 황금시대를 열었다. 마지막으로 정치활동기다. 세종 집권 후반기로 집현전 인원이 20명으로 축소됐다. 학문 못지않게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졌다. 학문 연구기관이었으나 세종의 신병으로 세자의 정무에 학자들이 적극 나선 탓이다. 이들 상당수는 훗날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수양대군에게 적대적이었다. 세조 2년(1456년)에 집현전의 전현적 학사가 주축이 돼 단종복위를 시도하다 실패했다. 이로 인해 집현전은 폐지된다. 그러나 집현전에서의 연구와 집현전 출신 학자들의 활약으로 조선은 나라가 안정되고 문물이 크게 일어났다. 한국 역사에서 찬란한 문화사상 황금기가 열린 것이다. 세종의 인재를 키우는 연구기관 설치는 조선의 500년 역사의 초석이 되었다. 글쓴이 이상주 서울시민대학에서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을 강의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또 여러 단체에서 ‘조선 명문가 독서 이야기’, 부모와 아이가 함께 듣는 세종의 공부법’, ‘CEO책쓰기’, ‘내 삶의 스토리 글쓰기’, ‘합격 자기소개서 작성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문화위원으로 지은 책은 ‘세종의 공부’,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10대가 아프다’ 등이 있다. 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 이상주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