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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작가의 ‘세종의 독서와 공부’ ②]안식년인가, 명예퇴직인가

지속가능한 나라의 발전 위해 ‘세종의 독서경영’ 벤치마킹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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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49호 박현준⁄ 2013.10.21 14:44:33

“직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념할 겨를이 없도다. 지금부터는 집현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라.” <세종실록> 공무원과 공기업 선호가 심하다. 보수가 많은 대기업보다 공무원을 희망하는 비율이 높다. 공무원과 공기업이 사기업에 비해 정년 보장이 잘 된 까닭이다. 특히 대학은 안식년 제도가 잘 지켜진다. 공부하고 더 연구하고 쉴 수 있는 분위기다. 삶의 질을 따질 때 안식년 제도가 있는 곳은 ‘꿈의 직장’이다. 어떤 기업은 안식년 대신 명예퇴직을 강요한다. 단지 나이가 들었다는 게 이유다. 정년이 보장되지 않은 직장인은 마흔 살이 넘어서면 불안하다. 평생고용 신화가 없는 사회,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 곰곰이 생각하면 인재경영이 아닌 사람 버리기 사회다. 사람은 많고, 기계가 대신하고… 그래도 사회가 발전하고, 개인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벤치마킹할 게 있다. 세종대왕의 독서경영이다. 삼가 생각하니 우리 조선은 성군들이 계속 나시고, 문치(文治)가 날로 높았다. 특히 세종대왕께서는 뛰어난 지혜와 세상을 보는 눈이 탁월하셨다. 그 뜻의 신묘함이 하늘의 이치에 부합되었다. 임금은 “나라의 제도와 규칙, 문물은 유학자가 아니면 함께 제정할 수 없다”며 천하의 수재를 집현전에 모아 아침저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말씀하셨다. 임금은 “바른 도리의 오묘함을 연구하고, 뭇 글의 깊고 풍부함을 널리 종합하려면 전문 학자가 절대 필요하다”고 하셨다. 비로소 집현전 문신 권채 등 세 명에게 긴 휴가를 주어 산의 절에서 글을 편히 읽게 하셨다. 재위 후반기에도 신숙주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어 즐기며 실컷 그 힘을 펴게 하셨다. 성종 때의 학자 조위가 쓴 독서당기다. 조위는 독서당기를 써 성종 24년(1493년)에 낙성식을 한 국립 독서당인 남호에 걸었다. 독서당의 유래를 밝힌 이 글에서는 세종이 유능한 인재들에게 특별히 휴가를 줘 공부에 전념케 한 사가독서(賜暇讀書)가 소개돼 있다. 젊은 학자들에게 정사에서 벗어나 홀로 깊은 공부와 사색 기회를 준 것이다. 사가독서의 첫 수혜자는 집현전 학자인 권채 신석견 남수문 등 3명이다. 이들은 세종 8년인 1426년 12월부터 3개월간 집에서 독서를 했다. 그러나 집에서의 공부는 어려움이 있었다. 친지들의 방문, 장소의 한정, 서적의 한계 등으로 독서와 연구에 전념하기에는 미흡하였다. 그래서 세종 24년(1442년)에는 장소를 조용한 산사인 진관사로 옮겼다. 또 장의사에서도 공부했다. 고려시대부터 왕이 시주하고 행차를 하던 국립사찰인 진관사는 조선의 국왕도 크게 중요시했다. 태조는 여러 번 행차하여 외로운 영혼을 위한 재를 올렸고, 태종도 어린 나이에 죽은 막내아들 성녕대군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많은 재산을 시주했다. 장의사는 태조가 신의왕후 한씨의 기신제를 지낸 곳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던 사찰이다. 따라서 두 절은 시설과 경제적 여건이 넉넉하고 조용한 산속이어서 학자가 공부하기에는 적격이었다.

사가독서를 한 학자는 서적마다 다소 다르지만 최항, 박원형, 유성원, 강희맹, 노사신 등 당대의 학자가 망라돼 있다. 대동야승에는 박팽년, 신숙주, 이개, 성삼문, 하위지, 이석형 등이 진관사 출신으로 나온다. 용재총화에는 홍응, 서거정, 이명헌 등을 장의사 수학생으로 적고 있다. 이들은 전통의 유학서인 경(經)과 백가(百家)는 물론이고 역사, 천문, 지리, 의약에다 점치는 복서까지 섭렵했다. 사기앙양 일환으로 유급휴가 줘 공부 장려 세종이 특별 유급휴가로 공부를 장려한 것은 사기앙양의 일환이었다. 집현전은 학자의 양성과 문풍의 진작, 국가 현안에 대한 연구가 목적이다. 연구는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집현전 학사는 다른 관직으로 옮기지 않고 내부 승진을 했다. 직제학 또는 부제학에 이른 뒤 육조나 승정원으로 진출하는 게 일반적인 루트였다. 우수 연구원은 장기 근무가 불가피했다. 정창손 22년, 최만리 18년, 박팽년 15년, 신숙주 10년 등 장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학자는 근무처를 옮기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구직의 승진 기회는 현장업무 부서보다 늦었다. 또 선비로서 현업부서에서 현실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다. 불만이 있는 학자들에게 세종이 당부를 하기도 한다. “집현전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문장에 능한 사람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지난 정미년에 집현전 관원을 친히 시험한바, 많이 이에 합격하여 내 은근히 기뻐하였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는 필시 항상 문한을 전공한 까닭이라고 했다. 그런데, 근자에 들으니, 집현전 관원들이 모두 이를 싫어하고, 사헌부와 사간원이나 육조로 전출을 희망하는 자가 자못 많다. 나는 집현전을 극히 중한 선발로 알고 특별한 예우를 해 대간과 다를 것이 없는데도, 일을 싫어하고 근무처를 옮기기를 희망함이 오히려 이와 같다면, 하물며 일반관리이겠는가. 과인의 신하로서 그 직임을 봉행하는 뜻이 과연 이 같은 것인가. 그대들은 태만한 마음을 두지 말고 학술을 전업으로 하여, 종신토록 이에 종사할 것을 스스로 기약하라.” 세종은 학자들의 불만을 해소하고자 집현전 학사의 서열을 같은 품계 관원 중 가장 위에 놓았고, 사헌부의 규찰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책이 출간되면 가장 먼저 볼 수 있게 했다. 여러 대책 중에서 대표적인 게 안식년 제도인 사가독서 도입이다. 젊은 학자에게 유급 휴가를 줘 책읽기로 몸과 마음을 추스리도록 했다. 사가독서는 세종의 지시를 받은 변계량의 아이디어였다. 세종은 변계량이 추천한 권채, 신석견, 남수문에게 사가독서의 첫 번째 혜택을 주었다. 학습성과가 관리되는 공부 휴가인 사가독서자는 미리 공부할 책을 지정받았다. 권채의 경우 대학과 중용을 과제로 받았다. 이를 공부하는 데는 약 3년이 필요한 내용이었다. 세종이 씨앗을 뿌린 사가독서는 세조의 집현전 혁파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성종 때는 독서당으로 정착된다. 빈집에서 하는 공가독서, 절에서 하는 산사독서를 반복하다가 서울의 남쪽인 용산에 독서당인 남호(南湖)를 지었다. 중종 때는 금호동으로 옮겨 동호(東湖)로 불렀다. 율곡 이이는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군주의 철인(哲人) 정치사상과 현실 문제를 문답식으로 정리하여 동호문답을 선조에게 바쳤다. 역대 임금은 사가독서자를 극진히 우대했다. 생활비를 모두 제공하고, 책도 수시로 하사했다. 또 술과 안주를 내려 격려했다. 학문을 숭상했던 성종은 독서당에 술과 함께 수정배(水精杯)를 보냈다. 이에 감격한 홍문관 관원이 도금으로 수정배의 받침대를 만들고 김일손은 독서에 전념하겠다는 글을 지었다. ‘맑으면 흐리지 않고, 비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물건을 덕으로 알고, 생각을 저버리지 말라.’ - 글쓴이 이상주 서울시민대학에서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을 강의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또 여러 단체에서 ‘조선 명문가 독서 이야기’, ‘부모와 아이가 함께 듣는 세종의 공부법’, ‘CEO책쓰기’, ‘내 삶의 스토리 글쓰기’, ‘합격 자기소개서 작성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문화위원으로 지은 책은 ‘세종의 공부’,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10대가 아프다’ 등이 있다.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 이상주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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