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자(71) 화백만큼 오랜 세월동안 한 가지 색에 집착을 보인 작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반세기에 가까운 오랜 화업(畵業)을 통해 작가의 화면에서 파란색이 빠진 적이 거의 없다. 작가의 그림이 어딘지 모르게 맑고도 고요하며 사색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청색조의 화면에 기인한다. 깊은 우수와 사색적 시정(詩情)이 느껴지는 장엄함과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분위기 역시 그렇다. 작가의 화면엔 아기자기하고도 감미로운 연두색이나 체리 핑크도 있지만, 숭고미로 충만한 대자연과의 깊은 교감이 전제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작가의 화업은 연작 ‘빛으로부터’, ‘자연의 조화’, ‘오로라를 넘어서’, ‘토스카나로의 초대’ 등이 이어진다. 반세기의 세월을 통해 프러시안 블루의 아련한 에테르 속에 작가 자신의 육신과 영혼, 그리고 꿈과 열정을 부단히 담금질시켜 왔던 화업의 대단원 같은 전시가 임박해 온다. 그렇다면 오래도록 작가가 청색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 특정 색에 집착하는 것은 무의식이나 성격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일 수 있으며, 또 하나는 다소 의식적으로 철학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기술하기 위한 하나의 기호로 선택되기도 한다.
작가의 경우는 전자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부터 그림과 시, 음악이 언제나 함께 해온 성장환경, 그리고 천성적으로 부드러움과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자연의 생명력을 탐닉하고 숭고한 자연이 간직한 초자연적 존재와의 은밀한 교감을 즐기는 인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것이다. 소녀 같은 순수함을 지키고자 하는 삶의 자세 하나만으로도 작가로서는 블루 마니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티스, 샤갈, 마리 로랑스의 영향 받았다” 작가의 이러한 청색조 화면은 ‘오로라를 넘어서’ 연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북유럽 여행 중에 체험한 오로라 비경의 감동을 화폭에 담은 것이 그것이다. 오로라는 자연이 연출하는 최고의 쇼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장대하고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그 패턴들이야말로 조물주가 피조물들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퍼포먼스가 아닐까. 황홀하고도 신비스럽게 펼쳐지는 북극광이 자아내는 대서사시와도 같은 장엄한 비경은 감수성 예민한 작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창조적 모티브로 살아 숨쉬게 된다. 작가의 대표적인 연작은 역시 ‘자연의 조화’이다. 신록의 잔디가 깔린 정원이나 공원에 감미로운 음악이 있고 평안한 안식과 정겨운 대화가 있는 장면으로서 행복한 축제의 유토피아가 그려지고 있는 시리즈이다. 물론 예의 맑고 화창한 프러시안 블루의 대기가 화면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아울러 화사하고 생기 넘치는 체리핑크의 꽃들이 만발해 있다.
작가의 화면은 정원이나 공원에서 펼쳐지는 행복한 축제의 장면으로 거장 와토(Jean-Antoine Watteau)에게서 보았던 근심 걱정을 초월한(sans souci) 현대판 ‘우아한 축제’이다. 다분히 원근의 질서를 이탈한 평면적 배열과 무중력 상태로 부유하는 것 같은 구성에서 작가의 꾸밈없고 자유로운 꿈꾸기의 진면목이 가감 없이 전달되고 있는 그림이다. 이렇듯 작가의 몇 가지 연작들은 각각의 특징을 따로 갖고 있지만 서로 교차적으로 오버랩되는 경우도 많다. 이번 개인전에서 발표할 작품들이 특히 그렇다. 크게 보면 대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아기자기한 필치로 그려내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오로라’ 연작이든 혹은 ‘자연의 조화’든 커다란 줄기의 미의식 안으로 수렴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그러했을 때 더욱 작품 자체의 밀도가 충실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작가의 화업에 있어 하나의 정점이라 할 만한 밀도를 보여주고 있다. 오로라의 서광 아래서 아련하게 드러나는 군마(群馬)의 행렬은 새로운 소재의 이미지와 오버랩 된다. 다른 화폭, 즉 ‘자연의 조화’와 같은 전원의 우아한 축제라는 콘텍스트가 삽입되어 더욱 환상적인 화면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황금빛으로 불타는 해바라기 들판도 토스카나 연작에서 등장한 것인데, 오로라를 배경으로 한 화면으로 옮겨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또한 근작들 가운데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겸재의 금강산도를 연상케 하는 심산유곡의 산수 이미지가 오로라 연작에 도입되어 연출되는 몽환적인 효과는 그야말로 절정에 달하고 있다. 각각의 연작이 가지고 있는 심미적 요소들이 결합되어 얻는 시너지일 것이다. 작가의 무한한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홍익대 대학원 졸업 후 1976년 프랑스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한 전명자(71) 작가는 프랑스 사람들이 좋아하는 푸른색 그림으로 호평을 받았다. 2006년 초 귀국해 분당 작업실에서 작업 활동을 펼치는 그는 “마티스, 샤갈, 마리 로랑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한다. 2007년 12월 프랑스 루부르박물관 초대전과 2005년 프랑스 국립미술협회 전시회(SNBA)에서 금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들은 11월 6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진행되는 초대 개인전을 통해 만나 볼 수 있다. - 글·이재언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