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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작가의 ‘세종의 독서와 공부’ ③]성왕 치적의 원천은 실무교육

조선 최초 ‘대리청정’ 도입, 제왕학 교육 후계구도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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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50호 박현준⁄ 2013.10.28 11:27:18

“18년 동안 호랑이를 탄 것으로 족하다. 양녕이 비록 마음이 선하여 정변을 일으킬 의심은 없다. 그러나 어제까지 세자의 지위에 있다가 폐출돼 외방에 나갔다. 어찌 틈을 엿보는 사람이 없겠는가?” 태종이 보위에서 물러나며 한 말이다. 태종은 18년(1418년) 6월에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그리고 2개월 후에 전격적으로 양위를 했다. 태종이 충녕과 신하들의 결사반대에 귀를 닫고 옥새를 내놓은 것은 후계구도를 굳건히 하려는 의도였다. 신임 국왕인 세종의 왕위를 탄탄하게 해주려는 조치였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방법을 잊지 않았다. 세자 향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다. 주로 몸이 불편할 때 세자에게 때로는 부분적으로, 때로는 거의 전권을 양도한 채 업무를 처리하게 했다. 임금은 가급적 많은 업무를 세자에게 위임하려고 했다.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큰 줄기는 변하지 않았다. 제왕수업은 이론으로만, 눈으로만 익히는 게 아님을 생각했다. 가장 좋은 수업은 직접 책임을 맡아 보는 실무교육이다. 세종을 세자에게 책임과 권한을 준 실무교육을 택했다. 임금은 19년(1437년)에 세자의 섭정을 처음 밝혔다. 세종은 마흔 살이고, 세자는 스물 세 살이었다. 임금은 의정부에 뜻을 밝혔다. “내가 나이도 들고, 풍질도 있어 세자로 하여금 정무를 보게 하겠다. 다만 벼슬 제수와 군사 업무, 사형수 판결은 예외로 한다. 이는 과인이 정사에 게을러서가 아니다. 옛날에도 태자가 섭정한 사례가 있고, 또 국왕의 자리는 세자에게로 반드시 돌아간다. 세자는 모든 정무를 판결하는 번거로움을 일찍 아는 것이 마땅하다.”

임금은 대리청정의 목적을 ‘완전 책임을 지고 판단하는 실습’이라고 했다. 제왕 수업을 정무를 직접 책임지고 하는 데서 이루지는 것으로 보았다. 세종은 이후에도 종종 세자에게 섭정을 맡겼다. 25년(1443년) 4월 18일에는 세자의 섭정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임금이 병환이 있으면 의정부와 육조에서 직무를 관장하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임금은 “병이 더욱 심해지니 이것도 또한 하늘의 뜻”이라며 세자의 섭정을 강행했다. 또 신하들이 세자를 대할 때 자신들을 신으로 칭하도록 했다. 왕조시대에 신의 호칭은 임금에 대해서만 한다. 역시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세자가 조회를 할 때 남쪽을 향해 앉도록 했다. 남쪽을 향해 앉는 것은 국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상징성이 있다. 신하들은 제왕은 북극성이고, 주위를 다른 별들이 둘러싸는 게 이치라며 반대를 했다. 하지만 세종은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이때부터 세자의 대리청정은 임금이 7년 후 승하할 때까지 계속됐다. 부드러운 리더인 세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대리청정을 했다. 그래서 세종의 치적 중 말년은 세자와의 공동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세종은 건강을 핑계로 세자에게 섭정을 시켜 정치를 익히게 했다. 정치는 이론이나 견학으로는 부족하고 직접 체험하고 판단해야 하는 복잡한 사안이다. 이를 아는 세종은 참여로써 책임 정치를 하게 한 것이다. 실무정치 익힌 세자, 예술과 과학발전 꽃피워 임금은 세자에게 세심한 교육을 했다. 세자가 8세가 되자 성균관에 입학시켰다. 조선의 왕세자 중 첫 성균관에 입학이었다. 수시로 세자의 공부 상황을 확인했다. 또 공부 방법도 자세히 설명했다. 매일 낮 공부 때 정인지, 최만리로부터 고금의 유익한 말과 바른 정치 이야기를 듣도록 했다. 또 백성의 일을 듣고, 행동거지도 편안하게 하도록 했다. 세자를 가르치는 학자들에게는 매 달 1일, 11일, 21일 등 세 차례와 유학서를 처음 읽는 날에는 회강을 실시하게 했다. 회강은 세자가 여러 학자 앞에서 배운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회강은 인조 때는 2일과 16일 두 차례로 축소됐지만 처음 회강제도를 만든 세종은 한 달에 세 차례를 기본으로 했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세자는 학문이 매우 높았다. 고금에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다.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했다. 역시 세종처럼 집현전을 자주 찾아 학문 토론을 했다. 아버지 세종의 닮은꼴이었다. 책에 몰두했고, 학자를 가까이 했고, 온화한 인품으로 듣기를 좋아했다. 판단이 신중하여 신하를 함부로 비난하지 않았고, 비난 받을 행동을 하지 않았다. 동생들을 잘 챙기는 맏형의 모습도 자상했다. 측우기 발명에 관여할 정도로 과학적 지식도 높았다. 천문 역산, 언어, 시, 서, 예 등 모든 방면에 빼어난 인재였다. 학문을 좋아했던 세자(문종)의 시가 성현의 용재총화에 실려 있다. 세자 시절에 귤을 먹은 뒤 감상을 쟁반에 적은 것이다. 향나무 향기는 코에만 향기롭고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단데 가장 사랑스런 동정호의 귤은 코에 향기롭고 입에도 달구나 학문에 정통한 세자는 대화와 예술에도 능했고 과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군사부분에도 탁월했다. 화차를 설계했고, 진번을 직접 저술했다. 매일처럼 활쏘기장을 찾아 격려하고 무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준비된 왕은 2년 3개월의 짧은 재위로 끝난다. 그러나 세종의 후반전과 자신의 임기 2년 남짓 동안 큰 업적을 이루었다. 이는 섭정을 통한 실무 책임정치를 익히게 한 세종의 교육 덕분이었다. 글쓴이 이상주 서울시민대학에서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을 강의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또 여러 단체에서 ‘조선 명문가 독서 이야기’, ‘부모와 아이가 함께 듣는 세종의 공부법’, ‘CEO책쓰기’, ‘내 삶의 스토리 글쓰기’, ‘합격 자기소개서 작성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문화위원으로 지은 책은 ‘세종의 공부’,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10대가 아프다’ 등이 있다. 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 이상주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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