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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작가의 ‘세종의 독서와 공부’]세종은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민생과 국방이 충동할 때 군사들의 실전능력 향상에 방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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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60호 이상주 역사작가⁄ 2014.01.06 13:06:10

국력을 판가름하는데 군사력의 중요성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의 4강이 각축하는 게 한반도의 현실이다. 해마다 국방예산에 시선이 쏠린다. 또 군복무 기간도 관심의 대상이다. 공무원 채용 때 군 가산점도 현안이다. 군 예산은 점진적 증가를 해왔고, 군 복무기간은 계속 감축됐다. 군복무 기간은 한국전쟁 직후에는 전군이 36개월이었다. 
1968년 1·21 사태로 육군 36개월, 해군과 공군은 39개월로 늘었다가 이후 계속 줄었다. 2012년에는 육군 21개월, 해군 23개월, 공군 24개월로 됐다. 2013년에는 8개월 단축근무가 논의됐다. 군복무 단축은 현대전이 공중전 위주의 첨단전쟁으로 바뀌는 여건 변화와 관련이 깊다. 
군사력과 방위산업 능력은 나라의 근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의 국방력을 최우선으로 하던 과거 정부와 글로벌 시대에 맞는 국방정책을 추구하는 최근 정부들은 나름대로 주장 근거가 있다. 그러나 세종대왕에게 자문을 구하면 어떤 형태든 군사력 증강에 우선을 둘 듯싶다. 세종은 민생과 군사력 증강 문제가 충돌할 때 군사들의 실전 능력 배양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문치국가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 한글을 창제하고, 안질에 걸려서도 밤늦게까지 책을 본 호학군주다. 각종 기록에도 백성을 사랑하는 영민한 군주로 묘사돼 있다. 세종실록은 ‘영명강과(英明剛果), 침의중후(沈毅重厚), 관유인자(寬裕仁慈), 공검효우(恭儉孝友), 출어천성(出於天性)’으로 표현했다. 빼어난 두뇌에 과감성과 강의함이 빛난다. 신중함과 너그러움과 인자함과 공손함을 갖췄고 효성스럽다는 뜻이다. 
문인기질이 강한 세종,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은 문무를 겸비한 군주였다. 국방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인 임금은 군사훈련인 강무(講武)에 극히 신경을 썼다. 32년 재위기간 동안 27회의 강무를 실시했다. 건강이 좋던 재위 24년까지는 매년 강무를 강행했다. 
1회의 강무 기간은 열흘에서 보름 사이다. 임금은 수천 명의 군사와 함께 말을 달려 강원도 평강을 17차례나 찾았다. 또 원주와 횡성 그리고 황해도 구월산에서도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했다. 강무는 군사훈련인 만큼 혹독했다. 특히 추운 겨울에는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진눈깨비가 내린 13년 2월 20일 기록이다. 
‘짐승을 영평현 보장산으로 몰려고 몰이꾼이 이미 출발했다. 진눈깨비로 인해 날씨가 몹시 한랭하고 길이 진수렁이 됐다. 사람과 말이 모두 휴식을 얻지 못했다. 추위에 얼고 굶주림으로 현기증을 일으키고, 죽어 넘어진 자가 많았다. 해가 질 무렵에는 기절한 군사 3명 외에 무수한 사람이 사경을 헤맸다. 말도 많이 쓰러졌다. 임금이 기병 20명을 발송해 술과 밥을 가지고 가 구조하게 하니 밤은 깊어 새벽에 이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탈진 상태에서 회복했지만 결국 26명이 사망하고 말 69필과 소 1두가 죽었다.’
강무는 인마의 피해 뿐 아니라 백성에게도 번거로웠다. 군사훈련이 실시되는 지역의 백성은 모든 행동에 제약이 있었다. 이에 따라 신하들은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의 감축을 요청한다. 

재위 24년까지 매년 강무(군사훈련) 강행
14년 1월 24일 형조참판 고약해가 아뢰었다. “강무는 임금이 친히 행하는 군사검열로 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희에 가깝습니다. 또 요사이는 사신 접대로 경기도 강원도에 부담을 주는 일이 잦습니다. 강무 일수를 줄이고, 가까운 곳에 거동하시어 백성을 쉬게 하소서.” 그러나 임금은 “강무는 유희가 아니다. 강무는 종묘를 받들고 빈객을 접대하고 무예를 익히는 일로써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훈련병들이 훈련장에서 연막탄 사이를 달려가며 각개전투 훈련을 받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세종은 군사훈련인 강무를 통해 신하들의 문약(文弱)을 막고, 군사들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했다. 세종은 문치주의를 표방했지만 나라의 안정은 강력한 무력으로 본 것이다. 또 군사훈련을 통해 국왕 중심의 상하질서를 확고히 하는 목적도 있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린 세자를 강무에 참여시키고, 세자에게 강무를 주관하게 한 것은 보위를 이을 세자를 나약하지 않은 강력한 군주로 교육하는 차원이었다. 강무는 세종 때에 체계화됐다. 
유동적이던 강무의 장소는 세종 2년에 궁성에서의 이동거리와 백성의 부담 등을 고려해 광주 양근, 철원, 안협, 평강, 이천, 횡성, 진보 등 경기도와 강원도 등으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해당 지역에서는 원래 주민이나 농사 짓던 사람 외에는 개간, 벌목, 사냥 등이 일체 금지됐다.
나라의 안정 속에 신하들은 강무의 중지를 계속 건의했다. 나라에 흉년이 들거나 홍수가 나는 등의 재해가 이유였다. 수만 명이 동원되는 강무는 백성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한 행사였고, 막대한 경비가 소요됐다. 그러나 임금은 단호했다. 태조 태종 때부터 제도화된 군사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다만 백성의 형편을 고려해 행사를 축소하고, 세자로 대신 주관하게 하는 융통성은 발휘했다. 
세종은 어떤 상황에서도 군사훈련은 계속돼야 한다는 의지를 실천했다. 또 세자에게 군사통수권자로서 강무를 주관하게 해 통치행위를 익히게 하는 의도도 실천했다. 군사력 강화에 힘쓴 세종대에는 화포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됐다. 완구, 소화포, 철제탄환, 화포전, 화초 등이 속속 개발됐다. 화포들의 제작과 규격, 화약 사용법이 그림과 함께 설명된 총통등록이 간행되는 등 강한 군사력과 함께 군수산업도 크게 발전했다. 

이상주 역사작가 (정리 = 이성호 기자)


- 글쓴이 이상주

서울시민대학에서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을 강의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또 여러 단체에서 ‘조선 명문가 독서 이야기’, ‘부모와 아이가 함께 듣는 세종의 공부법’, ‘CEO책쓰기’, ‘내 삶의 스토리 글쓰기’, ‘합격 자기소개서 작성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문화위원으로 지은 책은 ‘세종의 공부’,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10대가 아프다’ 등이 있다. 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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