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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신촌 아트레온’ 최호준 회장]나눔과 베품의 ‘광장’ 열다

도심 명물 신영극장, 아트레온 거쳐 ‘전각 뮤지엄’과 ‘갤러리 충’ 으로 거듭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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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65호 안창현 기자⁄ 2014.02.10 14:01:56

▲아트레온 ‘갤러리 충’에서 최호준 회장. 사진 = 왕진오 기자

복합문화공간인 신촌 아트레온은 일찍이 잘 알려진 도심의 명소와 다름없었다. 아트레온이 들어서기 전 지난 1950년대 설립된 단관 극장인 신영극장은 1990년대 말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하기 전까지 신촌에서 가장 큰 영화관이었다.

아트레온 최호준 회장은 부친인 우석(又石) 최규명 선생이 운영하던 신영극장을 물려받아 2003년 지금의 ‘아트레온’을 만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트레온은 대기업 영화관이 아닌 서울에서 몇 안 되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었다. 아트레온은 비단 영화관 뿐 아니라 도심 속의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2004년부터 매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다양한 시민행사가 꾸준히 열리고 있다. 이곳에 ‘전각 뮤지엄’과 ‘갤러리 충’이 새롭게 들어선다. 오는 2월 26일 문을 열 예정이다. 최 회장의 부친 우석 최규명의 전각과 서예 작품들이 전시된다.

“선친이 작고하신지 15주년을 기리는 의미에서 마련되었다. 전각 전용 뮤지엄과 갤러리 충 개관과 동시에 전각집을 출간할 예정이다. 선친이 남기신 750여 점의 서예 작품과 450여 방의 전각 작품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만 했었는데, 한학에 문외한이다 보니 엄두를 내지 못하고 15년을 흘려보냈다. 더 늦기 전에 조부와 선친이 남기신 문화유산을 방치하고 간다면 조상들께 많은 빚을 지고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뮤지엄과 갤러리에 소개되는 과거의 문화유산을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아트레온 5층에 위치한 전각 뮤지엄 전경. 사진 = 왕진오 기자


배려의 삶 일군 선친 우석 선생에 대한 추억

최 회장의 부친인 우석은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어릴 때부터 냉혹한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계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들은 마다하지 않았고, 운이 좋게 당시의 개성전기회사 견습공으로 취직해 자수성가를 이뤘다. 

최 회장은 “아버지가 생활력이 강하셨던 것 같다. 아마도 조부의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부(최치훈)는 위당 정인보와 친구로 지낸 당대의 한학자였지만, 집안은 무척 가난했다.” 고 말했다.

하지만, 자수성가한 우석은 사업을 운영하고 이끄는 과정에 직접 나서기보다 항상 다른 이에게 경영을 맡겨 왔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서예를 비롯한 다양한 취미 생활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으며 보냈다. 많은 사업을 하면서도 단지 장사꾼이란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한 것이다.

▲사진 = 왕진오 기자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진 선생은 서예를 취미의 수준을 넘어 필생의 가업으로 여겼다. 판에 박힌 고루하고 진부한 서예의 틀과 형식을 과감히 벗어나고자 했다.

“아버지는 상당한 이상주의자였다. 인간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말씀을 많이 하셨다.” 우석 선생의 자식 훈육은 깐깐하게 느껴질 만큼 엄했다고 한다. 아침 식사 전 아들을 불러 시작한 ‘잔소리’는 점심 식사를 지나 밤늦게까지 이어지곤 했다.

개성 출신인 우석은 돈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했다. 3대 독자인 최 회장은 신혼생활을 서울 망원동의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서 시작했고, 도쿄대 대학원 법학부를 다니면서도 일본 문부성 장학금을 받아 마쳐야 했다.

“아버지는 늘 ‘약자에 대한 배려’를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엄한 태도가 어린 내게 반발심도 갖게 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있는 집 자식이지만 바닥부터 산다’는 초심을 잃지 않게 해준 것 같다.” 최 회장은 부친으로부터 물질적 자산을 받기 전에 정신적 자산을 먼저 받은 셈이다.

현재 개관 막바지에 있는 전각 뮤지엄과 갤러리 충의 오프닝 행사 안내글의 한 구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축하화환 대신 전시도록을 구입해주신다면 사단법인 장아람 재단에서 장애아동들의 치료, 교육, 생활 등을 위한 비용으로 유용하게 사용하겠습니다.’

▲조부 최치훈 선생의 유품. 사진 = 왕진오 기자


신촌 아트레온은 개관 때부터 장애인 편의시설을 잘 갖춘 곳으로도 유명했다. 최 회장은 선친께 물려받은 신영극장을 개장하면서 9개 상영관 모두에 장애인 전용석과 전용화장실을 설치했다. 1관은 전 좌석에 청각장애인용 영화관람 보조기를 사용할 수 있는 장치를 달기도 했다.

최 회장은 경기대 교수시절인 1995년 ‘장애아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장아람) 재단을 세웠다. 이 단체는 후원회원 1500여 명이 내는 월 1200만원 정도를 모아 120명의 장애아동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한다.


경기대 총장 역임, 지금도 장애인돕기 앞장서

당시 장아람 재단이 설립된 계기는 한 학생과의 인연에 기인한다. 사회복지학 전공의 학생이 손말사랑회를 조직해 당시 학생처장으로 있던 그에게 후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장애인 가족을 둔 그 학생은 밤에 수위로 일해 생활비를 벌면서도 단과대 수석으로 받은 장학금의 절반을 장애인복지기관에 기부하고 있었다.

인연은 계속되었고 그 학생은 사회복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최 회장은 장아람 재단을 설립해 운영하며 장애아동과 그 가족을 계속 돕고 있다. 또 자신의 별장으로 마련했던 북한강가의 2000여 평 땅에 장애인들의 휴양지 겸 주말농장 ‘꿈땅’을 열어 그곳에서 재배한 고추나 배추를 장애인 가족들에게 보내고 있다.

물론 그의 나눔과 배려는 장애인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더 많은 관객을 들이려고 계단을 좁힌 다른 복합상영관과는 달리 아트레온의 계단과 복도는 어지간한 사무실만큼 넓다. 모든 상영관엔 창문을 2개씩 텄다. 화재 등의 긴급 상황에 대비한 배려다.

그리고,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서울 신촌, 그것도 교통 좋은 사거리 들머리에 자리 잡은 아트레온의 건물 1층을 시민들을 위한 광장으로 활용하도록 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그는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그의 선친 말씀대로 한결같이 실천하고 있다.

▲전각 뮤지엄에 전시된 우석 최규명 선생의 전각 작품들. 사진 = 왕진오 기자


선친의 전각 유품 전시, 문화공간 ‘광장’ 오픈

경기대 총장을 지냈고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는 최 회장의 전공은 도시행정이다. 도시 광장의 역할에 주목해 온 그는 “서양의 도시는 강인한 시민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광장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광장은 서구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광장이야말로 시민의 대화와 민주주의를 보증하는 훌륭한 생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불어 대학에서 줄곧 ‘문화행정’을 강조해왔다. 총장 시절에는 ‘감성 캠퍼스’를 모토로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했다. 어쩌면, 도시의 이성적이고 차가운 영역은 광장을 통해 우리 삶의 터전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광장은 라틴어로 포럼(Forum)이라고 한다. 포럼은 ‘밖으로’, ‘밖에서’라는 부사적 의미가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시민도시’에 “포럼이란 사람들이 집(닫아놓은 사적 영역)에서 ‘밖으로’ 나와 ‘밖에서’ 타인과 만나고 모임을 갖는 장소”라고 썼다. 대학교수로서, 문화행정가이자 운영자로서, 장아람 재단의 이사장으로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것들을 이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함께 나누는 열린 광장으로 기능하기를 바라고 있다. 

“부모님이 가르쳐주신 바를 실천하고, 받은 자산을 나누는데 힘을 기울이고 싶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보잘 것 없지만, 내 자식은 남을 위해 더 배려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선친의 뜻을 잇는 최 회장의 바람이다.

그토록 혼신을 다해 전력을 다한 작품들은 이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시민들과 함께 나누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최호준 회장이 베풀고 나눴던 다른 많은 것들과 함께 말이다.

- 안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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