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유교문화권인 동북아의 교육 지상과제는 인성교육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한자 가르칠 ‘교’(敎)는 효도할 효(孝)와 두드릴 복(攴 또는 攵)자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아이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효도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우리나라 명문가도 효를 으뜸의 덕목으로 가르쳐왔다. 가정교육에서 효의 중요성은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히 여겨져 왔다. 물론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효의 방법은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농경사회에서 효는 곧 봉양이었다. 부모가 젊고 건강할 때는 자식을 키우고 돌봐주지만 나이가 들어 기력이 떨어지면 자식은 당연히 부모를 봉양하는 것으로 여겼다. 봉양은 당시의 보편적인 윤리, 즉 도덕률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효의 개념은 확연히 달라졌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부모들은 자식이 봉양한답시고 같이 사는 것 보다 분가해 자주 찾아오는 것이 더 달갑다. 물론 손자와 손녀도 오면 좋지만 가면 더 좋다. 이것이 바로 부모들이 생각하는 ‘현대판 효자’의 모습이다. 세태의 변화를 대변해 주는 것이다.
시대와 사회를 막론하고 효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효의 개념이 확연히 바뀌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 것이라면 좋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가 인성교육을 등한시하고 지적교육에만 매달려온 결과이다. 부모들은 습관적으로 자녀들에게 “공부 잘하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다”라고 내뱉는다. 아이가 버릇이 없어도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용서받는 전대미문의 교육방법이 부모들의 머릿속에 이미 자리를 잡은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고학년 담임선생님을 맡지 않으려고 보직 배경시기만 다가오면 교무실엔 전운이 감돈다. 교직경력이 20년이나 되는 40대 여선생님이 자기 학급 아이들의 충격적인 언행으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교사들의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아이들로 하여금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게 하려는 부모들의 지나친 욕심이 빚어낸 부산물이라는 말이다. 이 나라 부모들은 더 이상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엄친아’라는 유행어가 있다. ‘엄마 친구 아들’의 줄임말이다. 학업이나 외모 등 다방면으로 뛰어난 젊은이를 지칭할 때 쓰인다. 자신의 자녀를 남의 집 아이들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다반사였으면 전 국민적 유행어가 되었을까.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형제와 자매를 비교하는 언행도 서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