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아티스트 - 김썽정]점의 집적과 색채의 영혼
화면을 유연하게 구획해 그 안을 점들의 반복으로 채워
▲쫑파티, 80.3x116.8cm, Acrylic on Canvas, 2011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잘 익은 수박, 중력이 부담스런 바나나, 받침 없는 커피잔, 만개한 해바라기가 기형적으로 생긴 의자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무엇인지 명확히 구별할 수 없는 문양의 색점들이 그 주변을 맴돌며 그것들의 윤곽을 재빨리 사라지게 하는 강렬한 빛으로 작동하면서 평평한 색점들의 조합으로 옮겨가게 한다.
결국 그것들은 사실 종의 구분이 사라진 동일한 구축, 화려하지만 감미로운 색상의 배치가 되어 버린다. 화면을 유연하게 구획하여 그 안을 점들의 반복으로 채워나간 김썽정의 그림은 그 익살스런 도상들의 적절한 조합과 배열에 따른 독특한 이미지를 색채와 마티에르의 향연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형상과 그것을 구축하는 색채, 내용과 형식의 친밀한 혼융은 작가의 민감한 의식이 열려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김썽정의 그림에 한정되는 것이긴 하지만, 형과 색채-가스통 바슐라르 식으로 말하자면 ‘형태적 이미지’와 ‘물질적 이미지’ 그 어느 쪽에 방점을 두느냐의 길항작용에 따라 양식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작가의 민감한 의식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시간들, 53X45cm, Acrylic on Canvas, 2014
김썽정의 회화에는 두 지평 간의 억압도 없지만 속박도 없다. 바꿔 말하자면 색채가 단순히 형상에 복속되는 것은 차단하되 재료로서의 색의 물질성이 드러나는 것을 기꺼이 피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그의 화면이 행위가 실린 붓질이나 마티에르의 층위가 두드러지지도 않으면서도 재료의 물성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더욱 흡입력을 가진다.
따라서 색점들이라고는 했지만 그것들은 터치(touch)도 타슈(tache)도 아닌 오롯하게 독립된 균질의 점이며 중첩과 반복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더욱 과시한다. 김썽정의 회화는 이렇듯 이미지와 물질 사이의 관계지평에 걸쳐있다.
그럼에도 불현듯 김썽정의 점(dot)은 대상의 형태를 형용하기보다는 점-그 자체를 형용하고 있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감상자의 눈은 형상을 쫓으면서도 동시에 그 점들의 놀이에 더 시선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점은 무엇을 묘사하는 기본적 요소로 등식화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형상과의 공존이 깨지지는 않지만) 형상의 재현에 봉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점 그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진정 이렇다면 대상은 구실일 뿐 목적이 아닌 게 된다.
그가 찍은 점들은 모델의 형태들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 아니 적어도 오염시키고 있다. 역으로 형태들조차 점들을 제어하지 못한다. 더 곰곰이 생각해보자면 점은 그 자체가 모델이면서 조형의 구성요소로써 재현적 형상을 취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는 재료 자체가 조형적인 요소로도 그리고 의미론적인 요소로도 기능하는 게 된다. 이쯤 되면 점들은 조형의 기본 요소로서의 일차원도, 평면을 강조하는 이차원도, 환영의 삼차원 구성물도 아닌 물리적 입자, 즉 사차원의 에너지가 된다. 물론 엄숙한 점 하나하나는 어떤 이동성 에너지도 느낄 수 없다. 방향성도 움직임도 없기 때문이다.
색점과 색점의 구조적 긴장과 균형
어떤 경우에도 선이 되고픈 의향은 없는 점들이다. 하지만 그 점들의 집중된 유기적 집적과 움직임은 분명 에너지의 가시적 표현으로 읽힌다. 바꿔 말하자면 현존, 그 자체가 아닌 존재와 구성입자 사이의 내적 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다 화면은 시각에 의존하기는 하나 촉각을 지향하기도 한다. 이 촉각성이 점의 물성을 더 부각시키는 요인이 된다.
화면과의 거리에 따라 색점과 형상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경향의 그림이 아니라는 점에서, 거리와 무관하게 드러나는 김썽정의 이런 점찍기는 광학적인 점묘파 회화에 기생하는 것이 아님을 웅변적으로 드러낸다(차라리 팝이나 키치에 가깝다).
▲친한친구, 41x31.8cm, Acrylic on Canvas, 2013
그것은 단지 점찍기의 색다른 유희와 물성에 다름 아니다. 최근 들어 피카소 작품과 민화를 차용하는 것도 그 관념이나 정신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익살과 해학 그리고 왜상(歪象)에 대한 관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역사적 양식에 회화적 미끼로써 자신의 논리를 던져 보는 것이다. 반면에 어찌 보면 그의 색점들은 강박적일 정도로 집요한 손의 축적이며 섬세하게 조율된 이 색점의 흐름은 정교하기까지 하다.
색점과 색점 간의 구조적 긴장, 형상과 색채의 균형 등이 어우러져 드러나는 구성은 보는 이의 시선에 잔잔한 파동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놀이나 유희를 논하는 것은 논리의 충돌이 있을 수 있다.
▲수박커플, 53x45.5cm, Acrylic on Canvas, 2013
이 점에 대하여 불평은 하지 말자. 논리는 논리이되 그는 건축가나 물리학자, 해부학자의 논리보다는 시인의 논리를 택한다. 그의 그림에서 익살과 유희는 또 다른 미덕이다.
작품에서 미학적 읽기는 피할 수 없으나 그렇더라도 이 모조된 것 같은 익살과 유희를 통해 작품의 내적 영혼을 이끌어 내는 것도 가능하다.
- 글·유근오 미술평론가 (정리 = 왕진오 기자)
유근오 미술평론가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