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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人 - 이은희]조각칼로 새기는 ‘검은 여왕의 눈물’

“세상이 얹은 왕관의 무게를 버틸텐가 벗을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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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25호 김금영 기자⁄ 2015.04.07 15:49:55

▲작품 옆에서 포즈를 취한 이은희 작가. 사진 = 김금영 기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어떤 왕국에 여왕이 있어요. 여왕은 항상 임신하고 있는데, 배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잉태돼 있어요. 그녀는 잉태된 사람의 기억을 사고파는 능력이 있었죠. 사람들은 잊고 싶거나, 영화 ‘매트릭스’처럼 새로 만들고 싶은 기억을 여왕에게 부탁하러 오곤 했어요. 이번 전시는 왕국의 사람들이 여왕을 만나러 떠나는 여정의 한 과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은희 작가는 현재 갤러리 토스트에서 열고 있는 ‘트립 - 파트2: 더 크라운(TRIP - Part2: The Crown)’전을 자신이 2010년부터 미술 작업과 병행해 써온 동화 ‘검은 여왕의 눈물’에 빗대어 설명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억을 갖고 있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수많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생각을 내비치기 쉽지 않은 세상이다. 사회 구조 속에서 개개인의 의견들은 거대한 다수 의견 아래 묵살당할 때가 있고, 자유로운 생각을 억압당할 수도 있다. 이에 사람들은 생각을 내보이기를 꺼리거나 생각을 조작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갖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이번 전시의 출발점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이은희의 작품 안에는 눈을 감은 채 다채로운 왕관을 쓴 인물들이 등장한다. 사진 = 김금영 기자

“사회질서가 형성되기 위해선 물론 규제가 필요하죠. 그런데 어려서부터 ‘이것이 옳다’ ‘1+1=2가 정답이다’ 식으로 교육받으면서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사고를 통제받지요. 이처럼 이성만을 강조하면서 본능이 침해되는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르다’와 ‘틀리다’, ‘잊어버리다’와 ‘잃어버리다’는 분명 다른 개념인데, 거대 사회의 다수 의견이 정답인 것처럼 통용되면서 ‘넌 이 선을 넘었으니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야’라는 흑백논리로 단정해 버리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생각 들킬까 눈 못 뜨는 세상”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자는 위로의 메시지

작가의 작업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눈을 감은 채 왕관을 쓰고 있다. 작가는 “눈 감은 것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이고, 왕관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어지는 여러 시선과 책임감의 무게를 보여준다”며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면 벗을 것이고, 견딜 수 있다면 버틸 것이다. 하지만 벗을 수도, 버틸 수도 없는 무게의 왕관이라면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어떻게 할지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은희 작 ‘더 크라운’. 리노컷 판화 기법을 사용했다. 사진 = 김금영 기자

작품을 정면에서 보면 얇은 종이 판화 정도로 생각된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의외의 두께가 있다. 작가는 리노컷(linocut)이라는 판화기법을 사용한다. 목판화와 목각의 중간에 해당하는 부조 판화로, 두꺼운 리놀륨 판을 조각도와 끌로 깎아 내 볼록 드러난 부분에 잉크를 묻히는 방식이다.

이미지를 따로 드로잉한 뒤 비치는 종이에 드로잉을 옮기고 리놀륨 판 위에 먹지를 깔아 칼로 파는 작업을 거친다. 겨울엔 판이 딱딱하게 굳기 때문에 열을 가하면서 작업하는데, 겉보기엔 단순하지만 만만치 않은 과정이다. 많은 힘을 써야 해 근육통이 생길 정도다.

“학창 시절 펜 작업을 좋아했어요. 선이 표현해내는 그 느낌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런데 칼로 판을 그으며 만들어지는 선의 오묘한 매력에 빠졌어요. 그 뒤로 쭉 판화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칼로 한 번 선을 그으면 흔적이 남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데, 이 점이 제 작업과 맞닿는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한 번 머릿속에 각인된 기억과 생각도 쉽게 돌이킬 수 없잖아요? 그 기억의 무게를 사람들은 견디며 살아가는 거고요.”

▲이은희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 토스트 전경. 사진 = 김금영 기자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관객의 마음까지 무겁게 만들고 싶은 건 아니다. 힘든 현실에 울분을 토하거나 날선 비판을 던지기보다,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각을 하자는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고 한다. 자신이 쓰고 있는 동화 속 이야기를 세상에 펼쳐놓은 이유다.

“철학자 니체를 정말 좋아해요. 생각한 걸 행동으로 옮길 때 스스로 판단해 나아가라는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거든요. 요즘 사람들은 생각할 거리는 많은데, 주변 상황에 시달리느라 자유의지를 갖고 스스로 판단할 기회는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전 누구에게나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할 권리와 의지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에게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검은 여왕의 눈물’ 이야기는 앞으로 열릴 전시들에서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아직 이야기 초중반이라며, 여왕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이야기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기대해달라고 당부했다. 전시는 갤러리 토스트에서 4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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