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人 - 황인란]흉흉한 세상에 던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진짜 피곤한 세상이다. 고3은 입시 스트레스, 대학생은 취업 스트레스, 직장인은 업무 스트레스까지 인생 어느 단계든 끝이 없다. 과거엔 몸이 아파 죽었는데, 미래엔 정신이 아파 죽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우울한 세상이다. 이 흉흉한 세상에 황인란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한 마디를 던진다. 2009년 갤러리 아트사이드 전시 이후 6년 만에 갤러리 그림손에서 펼치는 ‘영원과 하루’전으로 돌아온 그는, 수많은 부정 속 존재하는 긍정의 한 줄기를 찾는 작업을 선보였다.
전시명 ‘영원과 하루’는 1998년 개봉한 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의 영화 제목과 같다. 죽음을 앞둔 시인 솔로모스가 여행을 하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내용의 영화다.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은 당연히 어두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행을 하며 마주하는 과거의 편지, 난민 소년이 전해준 시어 등에서 그는 잊고 있었던 찬란한 과거의 순간들을 떠올리고, 그 한 순간의 긍정이 자신의 남은 인생에 대한 긍정으로 퍼지는 효과를 경험한다. 이 영화는 작가에게 특별한 영감을 줬다.
▲황인란 작가 개인전 ‘영원과 하루’전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 그림손 전경. 사진 = 김금영 기자
“저도 사실 그렇게 밝은 편이 아니에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허무함을 느끼고 절망할 때도 있죠. 하지만 한 순간의 긍정을 갖고 낙관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 그 조그만 노력에서 점차 세상이 바뀌어나가는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 가치관을 작품에 담고 있습니다.”
그의 캔버스를 살펴보면 한 소녀와 새, 그리고 나무가 등장한다. 처음 그림을 보고 느껴지는 이미지는 외로움이다. 잎이 메말라 앙상한 나무와 쓸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서 있는 소녀, 그리고 그 소녀 곁을 맴도는 새가 눈에 들어온다. 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상태에서 허무주의가 수반되고,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는 현대인의 상황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울하고 어두운 이미지에서 끝나지 않는다. 잎이 메마른 나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잎이 파릇파릇한 나무도 보인다. 또한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창문은 반쯤 열려 있는데 외부로 향하는 미래지향적 모습의 표현이다. 작가는 “작품 곳곳에 숨어 있는 긍정의 메시지를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황인란 작가의 작품. 쓸쓸해 보이는 한 소녀와 메마른 나무 사이 반쯤 열린 창문은 정체돼 있지 않고 외부로 향하고자 하는 긍정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진 = 김금영 기자
어떤 재료로 그렸는지 한 눈에 알아차리기 힘든 독특한 이미지가 눈길을 끌어 작품 가까이에 다가가보니 연필 선이 뚜렷하게 보인다. 작가는 연필과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그린다. 또한 작업에 함께 하는 것이 사진기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구성됐다. 나무 또한 마찬가지다. 작업실 근처에서 찍은 나무부터 여행을 갔을 때 발견한 나무까지 다양하다.
“일상생활에서 순간 마음에 들어오는 이미지를 찍으려고 늘 사진기를 가지고 다녀요.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많이 찍었고요. 어느 날엔 전철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의 이미지가 정말 좋아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은 적도 있어요. 나중엔 그 분이 전시장에 찾아와서 자신의 모습이 담긴 작품을 보는데 저도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찍으면 그 사진을 바탕으로 캔버스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이후 아크릴로 채색하는 과정을 거친다. 4B부터 샤프까지 다양한 종류의 연필을 사용한다. 작은 도구로 큰 캔버스를 채운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연필선 만이 지닌 섬세한 느낌을 좋아해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한 번 작업에 빠지면 한 자리에 17시간씩이나 앉아 있기도 한다고. “흐름이 끊기는 게 싫다”는 작가의 말에서 작업에 대한 애틋한 애정과 열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황인란 작가의 작품 중 하나. 영원과 하루, 캔버스에 연필-아크릴릭, 130 x 80.3cm, 2015. 사진 = 김금영 기자
이런 열정에도 불구하고 공식 개인전으로 돌아오는 데 6년이 걸렸다. 작가는 “6년이라는 공백이 비워진 게 아니라 과정과 훈련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다 뜯어낸 캔버스 양도 어마어마하다”며 웃었다.
부정 속 찾은 긍정 메시지를 연필로.
캔버스 속 소녀-나무-새 모습에
숨어 있는 긍정 메시지 찾는 재미
“바쁘게 전시를 이어가며 만족스럽지 못한 작품을 시간에 쫓겨 내놓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만족스러울 때 전시를 갖고 싶었어요. 작은 그룹전이나 소규모 카페 갤러리 전시에는 참여해왔지만 이번 전시가 새 출발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시를 준비하며 많은 걸 느꼈어요. 갤러리 큐레이터가 말하길 전시장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관람객이 30초 만에 전시장 전체를 둘러보고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작품 앞에서 1분만이라도 느린 시간을 가지길 권해요. 너무 빠르고 복잡해서 힘든 이 세상에 던지는 작은 위로와 긍정의 메시지를 느꼈으면 하네요.”
마지막으로 그는 “그림을 보고 어떻게 느끼든 좋아요. 어렵다고, 부담스럽다고 여기지 말고 나름대로 관점을 가지고 작품 감상을 즐겼으면 합니다”고 당부를 건넸다. 전시는 4월 28일까지.
김금영 기자 geum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