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 추천 작가 ① 국민대 김수연] “세상에 없는 세상 창조하고파”
(CNB저널 = 김연수 기자) CNB의 미술섹션 아트인은 이번 호부터 각 미대가 추천하는 촉망받는 새 작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1980년대 싹트기 시작해 이후 세계를 휩쓴 이른바 YBA(Young British Artists)의 흐름을 선도한 인물 중 하나로 세계적인 미술품 수집가-화랑 경영자 찰스 사치가 있습니다. 그는 기성 화단이 주목하지 않던 젊은 대학생 작가들 중에서 재능과 새로운 흐름을 찾아 나섰고, 이는 데미안 허스트, 사라 루카스, 트레이시 에민 같은 YBA의 스타 아티스트들을 키워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경제에서 양극화가 진행됐듯, 미술계에서도 ‘성 안 사람들’과 ‘성 밖 사람들’이 나뉘는 듯한 양극화가 진행되는 한국에서, 아트인은 YBA를 찾은 사치처럼, 대학문을 갓 나서거나 나서려는 젊은 인재들을 발굴해 커버스토리로 소개하는 기획을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는 국민대 미술대학이 추천한 김수연 작가(31, 국민대 미술대학원 회화과 재학 중)입니다.
▲김수연, ‘스페이스 모델(Space Model)’. 캔버스에 오일, 100 x 100cm. 2015.
‘트라우마: 정신적 외상’이란 말이 일상에서 쓰인 지 오래다. 이제 사람들은 삶의 과정에서 자신을 형성한 경험들, 그 중에서도 쓰리고 아픈 기억을 트라우마라고 쉽게 부른다. 그런데 그 트라우마란 것이 “그때 그 경험이 트라우마가 돼 내 모습이 이렇게 된 것 같아”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김수연, ‘유-보트65(U-BOAT 65)’. 캔버스에 오일, 72.7 x 100cm. 2015.
오히려 바삐 살다가 문득 이해할 수 없는 계기에 불쑥 울음이 터진다던가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깨닫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진짜 트라우마는 무의식에 깔아두고 사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새 내 삶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삶에 무뎌져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가슴 속 딱지가 몇 차례 바뀌어 떨어지고, 굳은살이 박이면서 어른이 돼가는 것 같다. 그렇게 자라버린 어른의 모습처럼, 젊은 작가 김수연은 어떤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채 마치 어린애가 장난쳐 만든 것 같은 이미지를 그려낸다.
입체로 그리는 아이디어 스케치
그의 작품은 처음 보면, 사진이나 종이에 그린 그림을 오리고 붙여 입체적으로 세운 뒤 찍어놓은 사진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것은 사진이 아니고, 하이퍼리얼리즘 스타일도 아닌 붓자국이 보이는 그림이다.
▲김수연, ‘유니버설 블록(Universal Block)’. 캔버스에 오일, 162.1 x 259.1cm. 2015.
사진 이미지를 출력해 입체 구조물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평면으로 옮기는 다채널 작업 방식으로 작업이 이뤄진다. 사진 이미지는 다양한 방식으로 구하는데, 그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요청하는 것이란다. 예를 들어 밤 풍경을 그리고 싶으면 지인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암전과 풍경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요청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녀의 작업에 흥미를 보이며 이미지들을 보내준다. 이미지들은 각 개인의 취향이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그녀는 수집된 이미지를 재조합해 그녀가 보고 싶은 풍경으로 만든다. 그렇게 다시 새로운 그녀만의 세상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녀는 “상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장애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보통 페인터들은 그림 그리기 전에 아이디어를 연필 드로잉이라도 하는데, 자신은 무언가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를 재조합해 만들어 낸 입체 구조물의 이미지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상상을 평면이 아닌 입체로 먼저 구현하는 셈이다.
내가 만약 증인이라면
그녀는 “작업 세계를 펼칠 때 나만의 작업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했다. 앞서 설명했듯, 여러 사람들로부터 모은 이미지를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품 안에서 그는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제삼자의 시점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김수연, ‘토성(Saturn)’. 캔버스에 오일, 40.9 x 53cm. 2015.
최근 그가 구현하는 작업 시리즈는 ‘세계상식백과’라는 책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그 책은 1970년대에 나왔는데, 그의 가족이 이사를 여러 번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버려지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그 책의 내용은 세계상식백과라는 거창한 이름이 무색하게도 지금 보면 코웃음이 나올 만큼 과학적 상식에 심령사진 같은 흥밋거리를 버무린 형태였다. 호기심에 이끌려 더 조사해보니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출간했으며, 전쟁 중 부상병과 간호사들이 주요 독자였다고 한다.
그녀는 그 책에 실린 토성 사진 같은 것들이 믿기지 않았다. 달의 뒷면 사진은 달에 가본 우주인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자신도 합성으로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단다. 작가는 자신을 뉴스 기자나 기념품을 만드는 장인이라고 설정했다. 그리고 상상했다. “내가 만일 이 사건을 증명해야 한다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고.
이상의 이미지가 현실에 존재하길
예술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작가가 전달하려는 주제를 이해할 수 있고, 작업 방식에 담긴 철학도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왜 이 그림을 그렸지?’라는 의문이 남는 작품도 있다. 김수연의 그림은 후자다. 그래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그림을 그렸냐고. 작가는 “내가 그린 이상적인 이미지가 현실에 실제 존재했으면 하는 간절한 기도 같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작업의 첫출발 소재는 새였다. 초반 작업에는 새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 역시 콜라주의 형식을 하고 있다. 로드 킬을 당한 새의 모습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작가는 죽은 새의 모습에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사촌 오빠의 기억이 오버랩 됐다고 했다. 정말 많이 좋아했고, 어린 마음에 커서 오빠와 결혼할 거라며 따라다니던, 지금도 이상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많이 처참한 모습으로 사망했다. 어린 김수연은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부모님으로부터 시신을 꿰매어 수습하는 데만 2~3일이 걸렸다고 들었다.
▲김수연, ‘브리스콘 파인(Bristlecone Pine)’. 캔버스에 오일, 90.9 x 60.6cm. 2015.
아기 같은 목소리와 얼굴로 자기 작업의 뿌리를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며, 작업 과정인 입체 콜라주 방식이 이해가 되는 동시에, 어느 순간 자신의 트라우마를 인식하고 반복됐을 고통과 그 고통 이후의 무뎌짐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김수연은 “상실감을 경험하긴 했어도 치유의 과정으로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작업 과정이 치유 효과가 없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보다는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만듦으로서 존재를 확인하는 데 의의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녀는 앞으로 출력한 사진이 아닌 색종이를 사용한 입체 콜라주로 정물화 느낌의 그림을 그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 사진은 이미지이지만 오랜 시간 그리다보니 스스로 여러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끼리 충돌할 때 의미를 읽어내려고 하는 것이 느껴져 답답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색종이 같은 조금 더 단순한 재료들로 결과물이 조금 더 탄력 있게 읽힐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연수 기자 hohma00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