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윤하나 기자) SNS-스마트폰이 세상을 집어삼기면서, 종이 신문-잡지가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는 시대에, 젊은 그래픽디자이너-미술작가들이 ‘책’에 주목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의 지난 10년간의 기록을 담은 전시회가 열렸다.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의 등장과 더불어 촉발된 ‘독립 출판 문화’의 지난 10년을 되짚어보는 전시가 열렸다.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3월 25일 오픈한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전이다. 이 전시회는 그래픽 디자인이란 도구이자 취향을 중심으로 밀접하게 움직인 이들이 지난 10년을 ‘자신들의 시선’으로 자평하고 재해석한 결과다. 이들은 기성의 논리로 세대를 정의하고 박제하지도 않는다. 또한 자신들의 업적을 걸작이라며 내밀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들의 지난 시도와 과정이 사멸하기 전에 ‘태도가 된 디자인’을 직접 소개한다.
“그래픽 디자인은 2005~2015년 서울에서 이랬어”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이란 제목 안에 전시 기획 의도가 그대로 보인다. 우선, 현상으로 나타난 독립 출판의 자유분방한 움직임을 그래픽 디자인이란 정체성으로 한정했다. 그리고 쉼표를 사이사이에 넣어, 매끄럽게 설명되지만은 않는 이 현상을, 서울이란 공간과 자신들의 연대기로 담아냈다는 공표다.
그래픽 디자인은 글자와 이미지를 조합해 시각 매체를 디자인한다. 여기서 디자인이란 시각적으로 그저 아름답게 꾸미는 것과 명확히 구분된다. 아이디어를 위해, 의미와 목적을 위해, 또는 더 나은 절차와 가치를 위해 효과적으로 요소들을 재구성하는 것에 더 가깝다.
▲2전시실에 설치된 길종상가 ‘3차원 세계의 화답’. 사진 = 나씽 스튜디오
▲소원영 ‘스몰 월드’ 설치 전경. 사진 = 나씽 스튜디오
‘디자인이 태도가 될 때’는 김영나 디자이너가 작업했던 계간지 <그래픽> 17호의 제목이다. 동시에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디자인의 정의와 맞닿아 있다. 올해 초 문 닫은 커먼센터의 공동 디렉터를 맡았던 아트 디렉터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로 잘 알려진 김영나는, 3월 30일 열린 강연에서 구정연 독립 기획자와 함께 그간의 주목할 만한 작업과 자신들의 협업 과정을 담은 프로젝트 ‘불완전한 리스트’에 대해 말했다.
‘디자인이 태도가 될 때’는 1969년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기념비적인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와 맥락을 공유한다. 당시 그 전시는 입지전적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이 종전 이후 유럽과 미주의 예술가들을 모아 기획한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큐레이터는 당대 미술과 전시 기획의 가능성을 ‘어떻게’라는 질문을 넘어 ‘왜’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김영나의 (그리고 ‘그래픽 디자인’전 참여자들의) ‘디자인이 태도가 되는 순간’에서도 그 확장성을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보다 왜 표현하고 실천하는가에 자연스럽게 집중하는 모양새다. 삶의 태도를 담은 자율성 아래 미학적 시도를 통해 경계를 넓히려는 움직임이 한국 디자인계에 태동하는 때였기 때문이다.
▲전은경·원승락 ‘(아웃 오브) 포커스’는 2전시실에 전시됐다. 사진 = 나씽 스튜디오
▲1전시실에 설치된 김성구 ‘요세미티 산에서 외골수 표범이 흰 사자와 우두머리 호랑이를 뛰어넘는다’. 사진 = 나씽 스튜디오
이전까지 한국의 디자이너들은 주로 회사나 에이전시에 소속돼 기업의 홍보물을 제작해왔다. 그러던 중 자발적으로(혹은 자연선택적으로) 틈새시장을 개척하고 문화 영역 전반으로 활동 영역을 넓힌 디자이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타협이 불가능한 기업의 의뢰 작업보다, 협업관계를 통해 유연한 의견 교류가 가능한 지점에서 자주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독립적 창작에 주목하게 됐다. 이 디자이너들은 지난 10년간 싸이월드, 이글루스 블로그를 거쳐 201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SNS 활동을 통해 서로 교류하며 협업해왔다.
가장 혁신적 움직임을 매료시킨 늙은 매체, 책
SNS와 스마트폰 시대에 이들이 특히 인쇄·출판물 활용을 늘린 이유는 첫째로 저렴한 비용 때문이었다. 돈 없는 작가, 디자이너가 적은 돈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추출해 표현할 수 있는 매체는 역설적이게도 바로 책이었다. 때문에 이 10년의 연대 그룹에 속한 이들과 이번 전시 참여 작가들은 인쇄 매체를 통해 여러 실험을 진행해왔다. 2008년 창성동의 작은 서점 ‘가가린’과 아트선재 내의 아트북 서점인 ‘더 북스(The Books)’가 문을 열었다. 가가린의 주축 멤버인 워크룸, 갤러리 팩토리, 카페 mk2 등이 모였고 관계망이 더욱 확장되는 계기가 됐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 2명도 여기에 깊이 관여된 인물들이다. 이 움직임을 처음부터 경험한 그래픽 디자인 듀오 ‘슬기와 민’의 최성민, ‘워크룸 프레스’의 김형진이 큐레이터로 초청된 것이다. 기획 단계에서 이 둘은 연대 내외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에게 현상을 해석해달라고 요청했다. 결론적으로 작가, 디자이너, 설계회사, 평론가, 교수 및 언론인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참여했다.
▲옵티컬 레이스 ‘33’ 설치 전경. 사진 = 나씽 스튜디오
우선 1층 전시장 입구에는 이번 전시의 서사 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된 데이터베이스 ‘101개의 지표’가 설치됐다. 서울을 중심으로 생산·향유된 2005~2015년 사이의 그래픽 디자인 중 시사적인 사례 101점을 선정해 기록했다. 이는 참여 작가와 관객 모두가 참조할 공통의 레퍼런스로 제공된다. 이 레퍼런스를 통해 해당 디자이너 및 작가들 그리고 한국-일본-중국의 각종 통계 연표를 엮어 시각화 한 작업(옵티컬 레이스의 ‘33’)이나 18점의 디자인 걸작을 선정하고 이에 관한 평론가의 동영상 강의 총 7점(김규호·임근준·조은지의 ‘걸작이로세!’)이 각각 전시됐다.
컴퓨터의 기본 바탕화면은 디자이너들의 안식처이자 감옥이다. 이를 재조합한 김성구의 ‘요세미티 산에서 외골수 표범이 흰 사자와 우두머리 호랑이를 뛰어넘는다’는 전시 시작 이래 SNS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미지를 콜라주해 거대한 스크린으로 옮김으로써 거대한 존재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킨 덕분이다.
▲김규호·임근준·조은지, ‘걸작이로세!’, 3채널 비디오 설치, 2016. 사진 = 일민미술관
그런가 하면 3층에 전시된 소원영의 ‘스몰 월드’는 최근 이슈가 된 아티스트 그룹 뮌의 ‘아트 솔라리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작품 ‘아트 솔라리스’는 국가 기금으로 열린 전시에 참여한 기획자 및 작가들의 빅데이터를 활용해 만든 ‘미술계의 권위 지도’다. 반면 스몰 월드는 국내 그래픽 디자이너들과 주변 협업자들의 협업 관계를 그린 네트워크 지도 프로젝트다. 큰 규모의 사업을 회피하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특히 비공식적이고 느슨한 인간관계가 네트워크의 생존 조건이 된 상황을 반영한 결과다. 네트워크가 더욱 강화하고 지속될 수 있는 이유를 작가는 이 과거의 협업 지도를 통해 찾는다.
이후 세대를 기대하며 과거를 재해석
이번 전시에 대해 “그들만의 리그를 자랑하는 자리가 아닌가” 하는 노골적인 시선을 드러내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미 독립적이고 자발적인 움직임이 작년을 기점으로 수면으로 올라왔고 특정 문화 향유층과 디자인 전문성을 가진 이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현실에서 이번 전시가 시사하는 바를 여러 참여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봤다.
디자인과 미술의 경계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김영나 디자이너는 “디자인의 개념이 그저 책과 팸플릿, 웹 사이트를 제작하는 것에서 벗어나 현재 많이 진화하고 다양한 활동으로 확장됐다. 다원 예술 프로젝트의 한 분과로, 현대 미술과도 연결된다”며 “디자이너나 작가라는 경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아이디어와 태도를 각자 다른 도구를 활용해 작업하는 창작자가 디자이너-작가 아닐까”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또 구정연 기획자는 “디자인이란 한 개인이 역사, 사회에 대해 갖는 시각성을 담보로 하는 컬렉션이 된다”며 디자인이 사회를 함유하는 관계성을 설명했다.
▲소원영 ‘스몰 월드 - 그래픽 디자이너’, 3채널 비디오 설치, 2016. 사진 = 일민미술관
25일 전시 개막에 앞서 기획자 두 명은 이런 말을 남겼다. “성과를 반짝 보여주며 흐름의 문을 닫아버리는 전시가 아니길 바랐다. 오히려 이 움직임이 다른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사멸해버리기 전에 다시 한 번 잘해보자는 의미를 담았다.” “우리를 포함해 이후 새로운 세대의 생산이 어서 촉발되길 기대한다.”
이미 결론이 나버린 책의 마지막 장이 아니라 목차 한 장의 마지막 문장, 즉 다음 장의 이야기가 궁금해 서둘러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묘수가 숨은 문장 같은 전시를 생각했다는 말이다. 스몰 디자인 스튜디오 이후 마이크로 스몰 스튜디오가 등장한 것처럼, 전시는 이들 이후 새로운 세대들의 또 다른 움직임이 어서 등장하길 기대하게 만든다.
‘태도가 형식이 될 때’는 1969년 전시 이후 베니스에서 정밀하게 복원돼 같은 시기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보다 더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또 당시에는 대중들의 지지를 그다지 끌어내지 못했지만 현재는 전설로 남았다. 이번 서울 전시를 베른의 당시 전시와 견주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전시가 담은 지난 10년의 움직임이 훗날 어떤 방식으로 기억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