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순서]
① 죽쑤던 ‘달러머니 한국영화’, 마침내 뜨다: 폭스와 워너가 직접 제작한 ‘곡성’과 ‘밀정’ 동반 흥행
태평양 건너 ‘황해’로 흘러들어온 미국 돈
할리우드의 대표적 메이저 스튜디오인 20세기폭스의 한국영화 직접 제작은 2009년 ‘황해’의 부분 투자와 배급을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2008년, 20세기폭스는 ‘폭스 인터내셔널 프로덕션(FIP: Fox International Production)’이라는 자회사를 설립했다. FIP는 북미 이 외 지역에 폭스의 자본으로 현지 영화를 투자·제작하는 회사다. 인도, 멕시코, 러시아, 태국, 스웨덴 등 영화의 수준이 높은 비영어권 국가들에 폭스의 자본이 진출해 현지 어(語)로 된 영화를 만들어 현지 시장에서 돈을 벌고, 경우에 따라서는 현지에서 만들어진 우수 영화로 전 세계에서 이익을 취하겠다는 글로벌 전략이었다.
그해 2월 한국에서는 나홍진 감독의 데뷔작 ‘추격자’가 개봉해 흥행몰이에 나섰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괴물’과 ‘타짜’ 외에는 평단과 관객 모두를 열광시킨 작품이 없던 한국 영화계에서 ‘추격자’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폭력으로 점철된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로는 드물게 500만 관객을 넘겼고, 내세울 만한 주연 작품이 없던 김윤석과 하정우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집요한 디테일과 파괴적 에너지로 가득한 나홍진의 연출력은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나홍진 감독이 들고 나선 차기작 ‘황해’는 마땅한 투자·배급사를 만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투자자들은 ‘황해’의 시나리오가 너무 길고 폭력이 과하다며 선뜻 나서지 않았다. 두 주인공이 모두 한국인이 아닌 연변의 중국 교포라는 점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 요소였다. 그러나 나 감 독은 그 시나리오의 양을 줄이거나 주인공을 고칠 생각이 없었다.
그 무렵 한국에 지사를 낸 FIP가 ‘황해’를 주목했다. ‘황해’ 관계자에 따르면 ‘추격자’를 본 샌포드 패니치(Sanford Panitch) 당시 FIP 대표가 나 감독의 재능을 높게 평가한 게 힘이 됐다. 패니치 사장은 영화의 창의적인 면은 철저하게 감독, PD 등 창작자에게 맡기는 제작자였다. 그는 ‘황해’ 시나리오의 과감성과 작가 나홍진의 자존심을 문제 삼지 않았다. FIP는 ‘황해’ 제작비의 20%를 투자하겠다고 나섰고, 20세기폭스코리아(주)가 배급을 맡기로 했다. 할리우드가 직접 투자한 한국영화의 첫 출항이었다.
위기의 할리우드, 눈을 밖으로 돌리다
20세기폭스가 2008년 FIP를 설립하고 해외 현지 영화 직접 제작에 나선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새로운 시장 창출이고 다른 하나는 경쟁력 있는 콘텐츠 확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기들이 세계 시장에서 위기를 맞았고, 콘텐츠 부족에 시달리고 있음을 인정한 셈이었다.
글로벌 경제 규모가 팽창하면서 세계 영화 시장의 규모도 꾸준히 성장했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영화 시장이던 북미는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러 성장이 정체되다시피 했다. 2000년대 초입에서 북미와 나머지 해외 영화 시장 규모는 1 대 1 정도로 대등했지만, 이젠 해외 영화 시장이 북미보다 2.5배나 더 크다.
미국 영화협회(MPAA)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북미 시장 규모는 약 9조 8100억 원에서 12조 3700억 원 정도로 대략 2조 5600억 원 성장에 그친 반면, 북미 이외에선 같은 기간 16조 500억 원에서 30조 3200억 원으로 무려 14조 2700억 원이나 늘어났다. 한국처럼 할리우드 영화보다 더 재밌는 자국 영화를 만드는 나라들이 그 격차를 점점 더 키우고 있다.
또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해,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도 웰메이드 장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나라들이 늘어났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비영어권 나라들에서 어지간한 할리우드 영화를 뺨칠 만큼 충분히 재미있는 자국어 영화들이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반면 할리우드는 속편을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고 리메이크 영화만 만들다 보니 ‘콘텐츠 고갈’이라는 비판을 십수 년째 들어왔다.
이에 할리우드는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되는 3D 입체영화, 또는 초대형 화면의 아이맥스 영화 등의 제작에 나서면서 ‘덩치’로 승부를 걸어보았지만, 영화라는 게 이렇게 덩치만 키운다고 흥행에 성공하는 게 아니었다. 초대형 예산이 투입된 미국산 개별 영화의 매출은 늘어났지만, 이는 해외 현지의 자국산 영화 점유율 상승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은 아니다. 할리우드가 새롭고 매력적인 콘텐츠를 내놓지 않는 한 이런 흐름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음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때문에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는 자기들이 가진 거대 자본을 다른 식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현지 영화를 직접 투자·제작하겠다는 작전이다. 현지 영화가 잘 팔리는 시장에서는 현지 영화를 만들어 팔겠다는 간단명료한 전략이다. 현지 상품을 만드는 법은 현지 장인이 가장 잘 알 터. 돈을 주면 알아서 좋은 상품을 만들 우수한 장인을 찾아내 모든 걸 맡기면 된다. 이것이 바로 FIP 같은 로컬 프로덕션이 하는 일이다. 폭스의 FIP 외에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이런 로컬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다.
폭스, 한국영화의 강렬함에 매료되다
FIP는 그동안 인도, 러시아, 독일, 스페인, 브라질 등 11개 나라에서 50여 편의 현지 영화를 만들었다. 그중 4개국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자국 영화 점유율이 90%에 달하는 인도에서는 ‘내 이름은 칸’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멕시코에서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을 지원해 ‘버드맨’과 ‘레버넌트’를 완성했다. 특히 이 두 작품은 흥행은 물론 아카데미에서 작품상(‘버드맨’), 감독상(2년 연속), 남우주연상(‘레버넌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촬영상(2년 연속, 엠마누엘 루베츠키) 등 주요 부문에서 수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FIP가 한국 시장과 한국영화에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한국의 영화 시장 규모는 세계 10위권에서 점점 상승하고 있고, 한국영화의 국내 점유율은 50~60%를 기록하고 있으니, 당연히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주요 공략 대상이다.
또한 한국영화는 여러 국제 영화제에서 자주 수상하고, 개성 있고 완성도 높은 작품들로 주목받아왔다.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감독 등은 세계적인 감독으로 인정받으며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었다. ‘시월애’ ‘거울 속으로’ ‘올드보이’ 등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그 밖에도 많은 영화의 리메이크 판권이 판매되었거나 협상 중인 상태다. 한국은 시장이 활발할 뿐 아니라, 한국영화의 수준, 관객 수준까지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외국 영화인들이 한국영화를 얘기할 때 가장 자주 언급하는 영화다. 패니치 전 FIP 대표도 “‘올드보이’를 보고 왜 진작 해외 작품에 눈을 돌리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정도”라며 FIP를 설립하는 데 한국이 큰 영향을 줬음을 밝히기도 했다.
나홍진 감독에 대한 믿음도 ‘추격자’를 보고 나서 시작되었다. FIP가 처음 투자한 한국영화인 ‘황해’는 제작 과정도 난관을 거듭했고, 배급 일정도 반년이나 미뤄졌다. 제작비가 솟구치는 바람에 2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봤는데도 손해를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IP는 나 감독의 세 번째 영화 ‘곡성’도 제작하기로 결정했고, 그 신뢰는 결국 관객 700만 명에 육박하는 흥행으로 이어졌다. 일단 믿으면 최대한 밀어주는 뚝심이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곡성’이라는 명작의 산실이 됐다.
계속된 시행착오, 그래도 믿는다
‘황해’의 촬영이 1년 가까이 진행되며 길어지는 동안 FIP는 차근차근 다음 프로젝트들을 준비했다. 인상적인 한국영화를 만든 감독들의 신작을 직접 제작하기로 결정하고, ‘그때 그 사람들’의 임상수 감독,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 등을 라인업에 포함시켰다.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도 제작하기로 했다. ‘중천’의 조동오 감독이 준비하던 액션 영화 ‘런닝맨’도 선택했다.
처음에 FIP는 1년에 두 작품씩 완성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영화 제작에 들어가기까지 한국과 미국(FIP)을 오가며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많았고, 처음이었기 때문에 상대의 입장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FIP가 전액을 투자하고 제작한 첫 작품은 ‘런닝맨’이다. 그런데 양측 관계자들이 “함께 하자”고 의기투합한 결정 이후 실제로 투자 계약서에 서명하기까지만 1년이 걸렸다. 계약서 작성에만 4~5개월이 걸린 뒤였다.
그리고 원래 임상수 감독의 ‘나의 절친 악당들’이 두 번째 영화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나의 절친 악당들’의 시나리오 완성이 늦어지면서 다른 영화를 먼저 제작하기로 했다. ‘헬로우 고스트’로 2010년 겨울 302만 관객을 불러 모은 김영탁 감독이 두 번째 작품 ‘슬로우 비디오’의 시나리오를 다 썼다는 소식이 들리자, FIP 코리아의 당시 허성일 대표가 적극 나서 이 영화를 FIP로 끌고 왔다.
부분 투자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황해’가 2010년 말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데 실패하고, 3년 만에 첫 영화 ‘런닝맨’(2013년) 이 개봉했다. 그러나 할리우드 자본이 투자한 대형 작품에 대한 기대가 무색하게 ‘런닝맨’은 140만, ‘슬로우 비디오’(2014)는 116만 관객 동원에 그쳤다. 적은 관객 수는 아니지만 두 작품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더구나 세 번째 영화인 ‘나의 절친 악당들’(2015)은 관객 13만 명에 그쳐 완벽한 손해였다.
FIP가 한국에 들어와 손댄 네 작품이 모두 흥행에 실패했으니 ‘폭스가 곧 FIP 코리아를 철수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이런 수군거림에 상관없이 ‘곡성’의 스케줄은 아무런 변동 없이 진행돼 2015년 촬영을 모두 마쳤고 FIP는 여전히 ‘곡성’ 이후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찾아다녔다.
‘슬로우 비디오’의 시나리오를 기획, 완성 시키고, 제작 과정을 총괄한 영화사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유재혁 대표는 “FIP의 패니치 전 대표나 FIP 코리아의 허성일 전 대표가 별 다른 걱정을 하지 않는 눈치였다”고 전했다. ‘런닝맨’과 ‘슬로우 비디오’가 손익 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것은 맞지만, 부가판권(IPTV, DVD 출시, TV 방영권 등) 판매 수익까지 합치면 별로 큰 손해를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성적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
유 대표는, FIP가 극장 흥행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한국 영화인들과 관계를 만들고, 그것을 이어가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나홍진, 김영탁 등 자신들이 믿고 맡긴 감독에게 계속된 신뢰를 보내겠다는 것이 패니치 전 대표의 입장이었다는 전언이다. 유 대표는, FIP가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서 영화를 제작해 나가려면 한국의 다른 영화사들, 특히 4대 메이저로 통하는 CJ, 쇼박스, 롯데, 뉴(NEW) 등에 못지않은 끈끈한 ‘인맥’을 갖출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유 대표는, ‘슬로우 비디오’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 패니치 전 대표와 몇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매번 나홍진 감독을 칭찬했다고 전했다. ‘추격자’는 그만큼 패니치의 뇌리에 인상 깊게 남았고, ‘황해’의 흥행 실패에도 불구하고 FIP는 ‘황해’를 자랑스럽게 여겼음이 분명했다.
FIP가 나 감독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허성일 전 대표가 ‘슬로우 비디오’를 패니치 전 대표에게 추천한 후, 패니치의 방한 일정에 맞춰 유 대표와 김 감독, ‘슬로우 비디오’의 프로듀서인 류정훈 PD 등이 그와의 첫 만남을 가졌다. 거기서 패니치는 자신이 왜 김영탁 감독에게 기대를 거는지를 밝혔다.
‘황해’ 개봉 당시 패니치는 이 영화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당시 ‘황해’를 누른 크리스마스 박스오피스의 승자가 바로 김영탁 감독의 조용한 데뷔작 ‘헬로우 고스트’였다. 패니치은 “무려 나홍진을 이긴” 김영탁 감독을 예의주시했고, 허성일 전 대표가 ‘슬로우 비디오’를 추천하자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는 것이다.
FIP가 ‘곡성’으로 전례 없는 흥행을 거둔 배경에는 이처럼 계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중장기적인 안목으로 파트너십을 구축 해나간 경영진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한국 진출에 대해 ‘간만 보고 빠질 것’이라고 섣불리 예단했던 일부 한국 영화인을 더욱 무색하게 만드는 것은 FIP가 ‘곡성’ 이후 진행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열 편 가까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워너, 8년간 한국영화 제작을 준비
한편, 또 다른 할리우드의 거대 권력인 워너브러더스도 최근 ‘밀정’을 직접 투자·제작·배급했고, 개봉 5주차인 10월 6일 현재 740만 관객을 넘기며 흥행에 성공했다.
워너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중 디즈니 다음으로 흥행 영화가 많고, 유니버설과 함께 매출 2위를 다투는 그룹이다. 당연히 폭스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그만큼 워너의 로컬 프로덕션 역시 FIP보다 큰 규모로 오래전부터 운영돼 왔다. 전 세계에서 현지 영화를 합작하거나 직접 제작한 편수가 600을 넘는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의 로컬 프로덕션 팀 관계자에 따르면, 워너 역시 8년 전부터 한국영화 투자·제작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직접 제작한 한국영화로 올해 첫 수익을 기록하기까지의 과정은 두 회사가 전혀 달랐다.
FIP는 한국에 전담 인력을 배치하자마자 ‘황해’의 부분 투자부터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그리고 당장 감독들과 프로젝트를 찾아 라인업을 꾸리고, 한국의 PSC(프로덕션 서비스 컴퍼니: 영화 제작을 실제로 전담할 파트너 영화사)와 여러 이견을 조율해 가며 작품 제작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FIP 스스로 한국영화 제작 방식을 이해하고 적응해 갔다.
영화사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유재혁 대표의 경험만 봐도 FIP의 변화가 보인다. ‘런닝맨’이 FIP와의 첫 미팅 이후 계약서를 마련하는 데만 4~5개월, 그리고 계약서 최종 사인까지 1년이 걸렸다. 그러나 이후 ‘슬로우 비디오’의 경우 총기간이 4개월로 확 줄었고, ‘곡성’ 이후 현재 촬영 중인 ‘대립군’ 등에선 그 기간이 훨씬 줄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소리다.
반면 워너브러더스는 일단 한국 영화 시장과 제작 여건 등을 분석하면서, 신중하게 조직을 꾸리는 데 치중했다. 워너브러더스 로컬 프로덕션 관계자에 따르면, 워너는 한국영화를 제작·투자할 부서를 신중히 선택해 조직했고, 일단 조직을 출범시킨 뒤에는 그 조직을 신뢰하는 스타일이다.
워너와 ‘밀정’은 최재원-김지운의 인연에서
2014년 11월 워너브러더스 그룹의 준 오(Jun Oh) 부회장은 문화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 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하는 국제 콘텐츠 콘퍼런스에 참석해 한국 로컬 프로덕션 설립을 언급했다. 2013년 한국 시장에서 한국산 영화와 할리우드 영화의 점유율이 60 대 35를 기록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2015년 ‘변호인’의 제작사인 위더스필름의 최재원 대표가 워너브러더스 로컬 프로덕션의 대표로 임명되었다. 그때까지 불투명하던 워너의 한국영화 제작은 최 대표가 합류하면서 본격화됐다.
최 대표는 바른손 공동대표 시절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제작했었다. 그 인연으로 김 감독은 신작 ‘밀정’ 프로젝트를 최 대표와 함께하려 했고, 최 대표가 워너브러더스 로컬 프로덕션 대표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밀정’이 워너의 첫 직접 제작 영화가 됐다.
워너는 신중하게 오래 준비했고, 최 대표도 노련한 제작자다. 그러나 워너 본사와 로컬 프로덕션이 첫 한국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FIP와 비슷한 난관을 거쳐야 했다. 장차 워너 로컬 프로덕션에서 쓸 표준 계약서를 만드는 데만 8개월이 소요된 것이다. 한국 방식과 미국 방식의 차이를 조율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더군다나 모든 사항을 계약서에 꼼꼼하게 기입해 넣고, 문제가 생기면 철저히 이 계약서의 조항에 근거해 문제를 처리하는 게 미국 방식 인지라, 계약서 틀 마련에 시간이 오래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두 나라의 각기 다른 입장을 조율해 내린 결론에서 FIP와 워너는 조금 차이를 보였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투자사와 제작사가 6 대 4로 수익을 배분한다.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 봤을 때 이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이다. 그래서 두 회사 모두 이 문제에 대한 조율이 필요했다.
FIP 코리아와 ‘런닝맨’의 제작사 크리 픽쳐스는 미국 방식을 바탕으로 한국 제작사 입장을 조율했다. PSC인 한국 제작사는 프로듀서 개런티와 흥행 수익에 따른 보너스를 받기로 했다. 반면 워너 로컬 프로덕션이 ‘밀정’ 제작 계약을 할 때는 최재원 대표가 한국 방식인 6 대 4 수익 배분 원칙을 관철시키는 대신, 다른 부분에서 미국식 룰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양보했다.
워너 역시 김지운 감독의 ‘밀정’이 만들어 낼 창의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재원 대표는 1년 반 동안 할리우드 시스템을 접하면서 많은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30여 편이나 되는 한국영화를 만들면서 익숙해진 한국의 자 관행이지만 워너의 꼼꼼한 법률 검토에 부딪히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흥행 성적보다 완성도에 대한 평가에 만족”
어쨌든 ‘밀정’은 스타 감독과 스타 배우, 한국인에게 익숙하면서 공감되는 소재 등 여러 흥행 요소를 갖추고 있었고, 계약 문제 외에는 비교적 순탄한 제작 과정을 거쳐 무난히 완성됐다. 그리고 추석 연휴라는 성수기에 개봉해 경쟁 영화들을 누르고 박스 오피스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가진 ‘흥행 요소들’의 기대치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연초부터 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2016년 1천만 관객 후보로 가장 먼저 ‘밀정’을 꼽기도 했다. 이런 평가에 대해 워너 관계자는 “흥행을 기대하기는 했지만 1천만 관객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또한, 추석 연휴가 길어서 연휴 기간 중에 충분한 관객이 들어서 고무되었지만, 예년에 비해 추석 시장이 확대되지 못하고 연휴 이후 시장이 급격히 축소된 것이 아쉽다는 마음을 전했다. 이 관계자는 “아마 여름 시즌과 가까웠기 때문에 영화 관람의 피로도가 누적된 것은 아닐까 분석한다”며 “교과서적인 이야기지만, 흥행 성적 이외에 해외 영화제 반응, 관객 반응 등에서 ‘웰메이드’로 평가된 것에 더욱 의미가 있다”며 새로운 시도를 통해 성공적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낸 것에 만족한다고 전했다.
또한, 첫 영화의 대성공이 향후 워너브러더스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지만, 세간의 섣부른 예측처럼 현재의 예정보다 라인업을 늘이지는 않을 것이고, 담담하게 진행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