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운동 - 서울 온 독일인 헨릭 야콥]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항하는 법: 소리치든지 눌러앉든지
"예술가가 먼저 움직여야 변화 생긴다"
▲자신의 작업과 함께 한 헨릭 야콥.(사진= Stefanie Rumpler)
올해 3월 마포구청은 홍대 앞 일대를 관광특구로 지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홍대 앞 관광특구의 모델은 명동과 이태원이다. 외국인 관광객을 늘리고 홍대 앞을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예술가들이 만들어 낸 문화를 기반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홍대 앞은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가 가장 먼저 드러난 지역이기도 하다.
이제 예술가의 작업 공간이 드물어진 홍대 앞의 문제는 현재 독립 예술 공간(아티스트 런 스페이스)으로 대표되는 젊은 예술가들의 움직임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홍대 일대 집값 상승으로 쫓겨난 예술가들이 차린 공간은 다시 옮긴 지역의 지대 상승으로 인해 없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아직 홍대 앞을 지키고 있는 예술가 집단을 중심으로 관광특구 반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연합을 결성하고 반대 서명 운동을 벌이는 이들의 움직임은 이제 더 이상 예술의 향취를 느낄 수 없는 지역이지만,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한 대책 하나 없이 경제적 발전만을 향해 달려가는 정책에 대해 제동을 거는 예술가들의 본격적인 움직임으로서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1970년대 이후 형성된 베를린의 독립 예술 공간 지도.(자료 제공=헨릭 야콥)
연합한 예술가들
한편, 홍대 앞에서 멀지 않은 예술 공간 ‘합정지구’에선 독립 예술공간과 젠트리피케이션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가 소개됐다. 소개자는 현재 합정지구서 개인전 ‘사랑하는 이웃들에게’를 열고 있는 독일인 예술가 헨릭 야콥이다.
그는 예술가이면서 독일 베를린의 베딩(Wedding) 지역에서 독립 예술 공간 ‘쿨투어 팔라스트 베딩 인터내셔널(Kultur Palast Wedding International)’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펼쳐 놓은 예술가들의 지역과 공간 이야기는 한국과 다를 것 없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상황에서 예술가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예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야콥의 공간이 있는 베딩 지역은 동-서 베를린을 가르던 장벽이 있던 자리에서 조금 서쪽으로 치우친 곳이다. 베를린 시내의 지대 상승과 통일 후 재개발로 인해 오히려 집값이 상승한 동베를린으로부터 밀려난 예술가들이 자리 잡은 베딩 지역엔 예술가들이 거주하며 작업하고 전시 공간도 직접 운영하는 독립 예술 공간만 100~120곳에 달한다.
이 지역의 독립 예술 공간들은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온라인 및 커뮤니티 등의 네트워크가 잘 짜여 있다. 매주 새로운 전시를 선보이는 금요일은 한국의 수요일 인사동 풍경처럼 관람객들이 각각의 공간을 방문하며 거리를 채운다. 이 지역은 예술가들이 오랜 시간 한 자리에 머물며 상업 갤러리 공간에서 선보일 수 없는 실험적인 작업들을 선보인다는 특성뿐 아니라 베를린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도 자리 잡고 있다.
▲야콥이 운영하는 ‘쿨투어 팔라스트 베딩 인터내셔널'의 전시 공간.(사진= Kultur Palast Wedding International)
예술에 관한 공공정책은 어떻게 생기는가?
세계 각국에서 오는 관광객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주요 컨텐츠가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예술가들에게 전시를 대가로 도시의 빈 아파트를 제공하는 주택 공사와 복권 및 호텔 수익의 30% 가량을 문화 예술에 투자하는 공공 정책이 기반이 된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시가 해마다 10군데의 독립 예술 공간을 선정해 약 4000만 원의 상금을 주는 것도 그런 정책의 일환이다. 10년이 넘게 운영해 온 야콥의 공간 역시 이번에 상금을 받았다. 야콥은 이번 상금으로 공간을 운영하며 쌓인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며 즐거운 사족을 붙였다. 그가 받은 상금으로 빚을 갚을 수 있었던 것은 전시와 운영 기획에 대한 상금이 아닌 이미 제시된 결과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많은 예술 관련 정책들에서, 앞으로 일어날 기획에 예산을 측정해 주고, 지원금을 받은예술가들은 어디에 지원금을 썼는지 증명하기 위해 영수증 작업에 많은 시간을 뺏기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예술에 대한 공공 정책이 잘 돼 있는 편이라고 해서 이들의 상황이 여유롭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의 예술가나 그렇듯 그들 역시 자신들이 표현하고 싶은 예술 세계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이런 정책이 마련되기까지 예술가들 역시 많은 노력을 보였다.
2009년 그들이 벌였던 축제는 예술가들이 스스로 작업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의 분기점이었다. 100개가 넘는 독립 예술 공간 중 약 20개 공간들이 모여 시작한 축제는 분장을 하고 차를 만들어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위의 형태로 진행됐다. 그들이 외쳤던 구호는 ‘예술가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정책을 확보하라’ 등이 아닌, “예술가(우리)가 잘못했다!”였다. 지대가 오른다고 해서 자꾸 도망가듯 이사를 가는 것이 잘못됐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위 퍼레이드가 끝나고 그들은 기자회견에서 “어떻게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 제기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베딩 지역을 배경으로 독립 예술공간 연합 역시 생겨났다. 이 연합은 공공 예술 정책의 마련과, 해마다 기금이 수여하는 10군데의 독립 예술 공간 선정에까지 많은 관여를 하고 있다.
▲2009년 벌어진 시위 형태의 축제 모습.(사진= Kultur Palast Wedding International)
교류와 공존의 독립 예술 공간들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는 어느 나라나 존재한다. 헨릭은 이번에 자신이 운영하는 공간을 처음 계약 당시의 3배가 넘는 가격으로 재계약했다고 했다. 그는 “예술가에게는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앞으로 다른 독립 공간들이랑 연합해 펼쳐 나갈지, 일회성 전시를 위한 단기 임대를 할지, 온라인으로 공간을 옮길지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이라며, 질문을 하나 던졌다. ‘왜 독립 예술 공간들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가?’
야콥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예술은 고급을 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사고파는 물건에 예술의 존재 기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아이디어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어떻게 교류하며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들의 연합은 현재 프랑스 등지의 다른 나라의 독립 공간 연합과 교류를 넓혀가고 있다며, 한국의 독립 공간과의 교류 역시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어떻게 교류하며 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야콥의 열망은, 합정지구에서 점토 작품, 드로잉, 탁본 등의 작품을 통해 ‘사랑하는 이웃들에게’라는 전시 제목처럼 소박하면서도 따뜻하게 제시된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술가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10월 29일까지.
▲이번 합정지구에서 개최된 헨릭 야콥의 개인전은 교류의 장을 만들 수 있는 술이 담긴 바를 작가가 제작하고 동네를 순회하는 퍼포먼스와 함께 시작했다.(사진=홍철기)
김연수 breezeme@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