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8호 김금영 기자⁄ 2016.11.04 15:00:54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의사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이들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5살이 되자 TV에서 누가 바이올린 켜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 어린 두 눈을 밝히며 “나 저거 하고 싶다”고 했다. 클래식을 좋아한 아버지는 바로 아들의 손을 잡고 바이올린을 사러 갔다. 그리고 아들은 5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세계가 인정하는 음악가로 성장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승일 이야기다.
이승일이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 & 소나타 전국 앨범 발매 기념 초청 리사이틀을 11월 19일 남한산성아트홀, 11월 25일 KBS아트홀에서 연다. 바이올린 하나로는 아무리 재미있게 연주하더라도 1시간 반이라는 공연 시간을 사람들이 지루하게 느낄 수 있기에, 피아니스트 유혜영, 그리고 챔버 오케스트라 수작골 카마라타와의 협연도 보여줘 공연을 풍성하게 꾸민다. 브람스 소나타 제2번, 바흐 파르티타 제3번, 멘델스존 현악 심포니 제1번(광주 공연)과 바흐 파르티타 제2번, 슈베르트 소나타,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겨울(서울 공연)을 연주한다. 그래서 요즘 이승일은 연습에 여념이 없다.
국내에서는 이승일이라는 이름이 다소 생소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넓은 세계무대에서 주로 활약했다. 바이올린의 전설이라 불리는 오스카 셤스키, 펠릭스 갈리미얼, 나탄 밀스타인, 죠지 카스트, 유디스 샤피로, 예르코 스필러 등이 바로 이승일의 스승이다. 대가들로부터 발탁돼 수석 제자로 사사를 받은 이승일은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로 입상했다. 그리고 피츠버그 심포니에서 로린 마젤 지휘 시절에 한국인 최초로 악장을 20년 넘게 역임했다. 국내에도 익숙한 영화 ‘타이타닉’의 음악 감독 제임스 호너의 제안으로 할리우드 영화 OST에도 많이 참여했다. 약 500편 이상의 녹음 편수를 기록했다.
이승일에겐 외국 생활이 더 익숙하다. 11살 때 미국으로 떠나 미국 동부, 서부, 남부, 중부를 비롯해 세계무대에서 바이올린을 켰다. 그랬던 그가 돌연 한국에 돌아왔다. 처음엔 공연을 하기 위해 왔던 거라 몇 달 있다가 금방 갈 줄 알았는데, 여기서 2016년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됐다. 앨범 발매와 리사이틀 공연은 물론이요, 올해 8월 ‘수작골 카마라타’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다. 수작골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하나의 골짜기 이름인데, 클래식 팀과 국악 팀으로 구성됐다. 골짜기에 졸졸 흐르는 아름다운 시냇물 소리처럼 아름다운 이들의 연주가 울려 퍼지는 단체다. 왜 이승일은 한국에 와서 이 단체를 만들었을까?
“한국에 몇 번 공연을 왔을 때 충격을 받았어요. 여러 사람들과 인연이 닿으면서 한국에서 이뤄지는 음악 교육에 대해서도 알게 됐죠. 그런데 ‘함께’가 아닌 ‘혼자’ 골방에서 연습할 때가 많았어요. 아이들이 선생님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는커녕, 만날 기회조차 잘 없고요. 그보다는 학연, 지연에 탑승하기에 더 바빴어요. 또 선생님들은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서면 연주도 잘 하지 않더군요. 연주를 잘하냐, 못하냐의 기준도 악보에서 몇 번 틀리느냐에 따라 갈렸고요. 아이들이 기계적으로 연주를 하는 모습이 안타까웠어요. 물론 틀리지 않는 기술은 중요하고, 혼자 공연을 해내야 할 때도 있죠.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저는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가르쳐 주고 싶었어요.”
이승일은 스승과 대화가 많았다. 스승들로부터 ‘겸손해야 한다’고 배웠다. 한 번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악장을 맡았을 때 의욕도, 실력도 형편없는 지휘자를 만났다. 저 사람과 함께 연주를 해야 하나 회의감이 들었을 때 스승인 예리코 스필러에게 편지를 썼다. 그때 스승은 “아무리 형편없는 지휘자를 만났어도, 스스로의 수준을 낮추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했다.
연주를 잘하냐, 못하냐 기준이 틀리는 횟수?
유치한 점수 경쟁보다 마음의 화합이 우선
이승일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유치한 신경전을 많이 마주했다. 마음에 안 드는 연주자가 있을 때는 그 연주자 주변에서 자기들끼리 키득 키득대기도 하고, 지휘자의 지휘도 무시할 때도 있었다. 마음이 어지러운 가운데 다시 스스로의 연주에 몰두하고, 화합을 꾀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스승의 가르침 덕분이다. 그래서 혼자 활동하고 혼자 스타가 되는 게 아니라, 결국은 마음을 합쳤을 때 비로소 감동시키는 음악이 나올 수 있음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뻔한 이야기라 여길 수도 있는데, 음악에 마음을 담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기술적으로는 얼마든지 잘 하는 사람이 많지만, 음악을 겸손하게 대하고 진심으로 다가설 때 바이올린이 내는 소리에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승일 또한 50년이 넘었지만 똑같은 곡을 아침에 연주하고, 또 몇 시간 뒤에 연주할 때조차 다르단다.
“제 교육 방식을 처음엔 아이들이 난감해 했어요. 무엇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게 아니라, 이 흐름도, 저 흐름도 맞을 수 있다고 매번 다른 방향을 이야기하니까요. 그런데 나중엔 자기들이 재미가 들려서 입시가 끝난 다음에도 찾아와서 ‘선생님, 저 이번엔 뭐 연주해볼까요?’라 묻더라고요. 1년에 두 번씩 아이들, 그리고 전문 선생님들과의 캠프를 진행했는데, 이걸 더 구체화시키고 싶었어요. 그래서 단체를 만들게 됐죠. 하지만 교육이라기보다는 음악 페스티벌 느낌에 더 가까운 단체예요. 음악을 즐기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거든요(웃음).”
클래식과 국악의 조화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인연을 쌓은 사람들 중 국악 관련 종사자도 있었다. 국악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어릴 때부터 아리랑, 도라지 등 민요를 듣고 자랐고, 장르와 동서양 구분 없이 음악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국악을 들으니 화음이 없이 리듬 위주로 이뤄지는 걸 발견했고, 여기에 서양 악기가 화음을 넣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래식과 국악의 조화라는 것이 현 시대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아예 극까지 넣어 선보이는 시도를 했다. 10월 15일 수작골 3기 정기 연주회 때 ‘아리랑’과 음악극 ‘호랑이와 곶감’을 선보였다. 반응이 좋아 앞으로 기획 시리즈로 선보일 계획도 있다.
“국악 팀과 서양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많이 보여요. 그런데 하나의 연주를 위해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음악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채 연주만 하고 바로 흩어질 때도 많죠. 그런 의미에서 수작골은 장르를 넘어 국악과 클래식의 조화를 끊임없이 그리고 꾸준히 연구하고, 마음을 합한 연주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음악은 하나라고 믿는 이승일은 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많은 관심도 부탁했다. 친숙하게 여겨지는 대중가요와 달리, 클래식은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의 외면을 받는 가운데 음악가에 대한 대우도 좋지 않다. 대중적이면서도 음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뮤지컬에서조차도 큰 주연급 배우들 캐스팅에 더 신경 쓰고 음악에 대한 투자는 잘 이뤄지지 않을 때도 있다. 단기적으로는 돈을 벌 수 있지만, 이 공연을 본 외국인이나 음악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장기적으로는 큰 손해다.
“저조차 클래식을 지루하게 느꼈을 때가 있었어요. 마음으로 대하기 않았기 때문이죠. ‘공연 지루하겠지’ ‘어렵겠지’라는 편견이 형성돼 있는 사람들에겐 음악이 잘 들리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음악은 어렵지 않아요. 꼭 공부하지 않아도,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들으면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음악을 들려줄 음악가들도 많이 필요하죠. 음악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승일은 지금도 매일 바이올린을 손에 든다. 꼭 두 번은 온 집중을 다해 연습한다.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없었으면 진작 관뒀을 일이다. 여전히 무대에 서기 전 설렘으로 가슴이 떨린다고도 한다. 이 열정으로 그는 한국에서의 음악 인생 제2악장을 힘차게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