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계 중진 작가들의 작품이 안도 타다오의 건축과 만났다.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JCC(재능문화센터) 개관 1주년 기념전 ‘노출된 콘크리트(Exposed Concrete) 전’이 지난 10월 27일 열렸다.
안도 타다오의 뉴 시그니처 미술관, JCC
지난해 문을 연 JCC는 세계적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서울 서대문 내의 유일한 건축물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은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차갑지 않은 느낌이 특징이다. JCC의 두 건축물(JCC 아트센터, JCC 크리에이티브센터)에는 안도 타다오만의 열림과 닫힘, 그리고 사선의 미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출 콘크리트는 별도 마감재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건축 방식을 말한다. 그는 수많은 건축물을 설계했는데, 그중에서도 미술관 건축과 인연이 깊다. 대표적으로 일본 고베의 ‘효고 미술관’, 미국 텍사스의 ‘포트워스 현대미술관’을 설계했고,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와 협업한 일본 도쿄의 ‘21_21 디자인 사이트 디자인 전문 미술관’과 베니스의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 박물관’의 리모델링 등이 있다.
한국 미술계 중진 10인이 드러내는 무게감
이번 '노출된 콘크리트'전에는 50대 중반에서 60대 중반 사이의 중진 작가 10인이 초대됐다. 참여 작가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윗세대와 아랫세대를 이어주는 한국 미술계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회화, 조각, 설치에 이르는 다양한 작업이 한 장소에서 만나 서로 충돌하고 조응하는 견고한(concrete) 화학작용을 드러낸다(expose).
JCC아트센터는 1층부터 4층까지 전시 공간이 마련됐다. 이번 전시도 갤러리 네 개를 아우르며 열렸다. 전시장을 직접 둘러보면 각 층이 저마다 크기와 형태가 다르고 동선이 변화무쌍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유기적인 동선은 관람객 간의 만남도 자주 촉발하지만, 관람객이 작품을 만날 때도 빛을 발한다. 이제 각 전시장에 걸린 작품과 작가를 둘러보자.
1층 갤러리에는 이수홍 작가의 조각과 조덕현 작가의 그림이 전시됐다. 이수홍은 양 끝에 요철(凹凸) 모양을 한 나무조각 등을 출품했다. 이는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의 극단적인 상황들을 모두 품은 균형을 보여준다. 사람을 닮아 싹이 트고 자라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는 나무를 재료로 택했다. 조덕현은 1950-60년대 동명의 한국영화에서 영감받은 ‘청춘쌍곡선’과 영화배우 김지미 씨의 1960년대 모습에서 출발한 ‘창변의 K양’ 작품 2점을 걸었다. 영화와 관계된 확실한 원본 위에 교묘한 허구를 결합한 이미지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놓인다. 이를 다시 정직한 소묘로 그려낸 이유는 그 모습이 허상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리얼리티를 담보하기 위함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2층에는 이용덕, 윤영석 작가의 전시가 이어진다. 이용덕은 상자 안쪽으로 오목하게 사람의 빈자리를 음각한다. 작가는 그 빈자리를 통해서 역으로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윤영석은 평면 작품을 2층에, 입체 조각은 4층에 전시했다. 홀로그램을 이용한 평면 작품은 시선의 위치에 따라 농구공이 골대에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않은 상황이 모두 보인다.
4층에 전시된 윤영석 작가의 '뼈총'은 특히 인상적이다. 총을 형상화한 조각상 안에 마치 뼈가 발린 것처럼 보이는 육체적 실체가 드러난다. 총이 가진 물리적 파괴력을 읽을 수 있다. 또 다른 그의 조각, 복제 양 돌리를 연상시키는 '표본실의 양들'은 탐욕적인 생명복제에 대한 좌절감을 나타낸다. 3층에는 원인종 작가의 전시가 이어진다.작가는 가느다란 철선을 용접해 구름이나 산의 형상을 표현했다. 수많은 철선이 녹아 붙은 모습은 철의 물성을 넘어서 먹으로 그려낸 수묵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넓은 4층 갤러리에는 김춘수, 윤영석, 이석주, 김태호, 이기봉, 안규철의 작품이 널찍하게 전시됐다. ‘울트라마린’ 그림으로 잘 알려진 김춘수는 이 단일 색상을 통해 회화의 본질을 실험한다. 이석주는 여러 오브제를 결합한 초현실적인 화면을 구성하고 이를 서정적인 방식으로 그려내 자신만의 하이퍼리얼리즘을 구축한다. 이번 전시에는 책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김태호는 캔버스 위에 많은 색을 입히고 쌓은 뒤 이를 다시 깎아내며 내면의 색층을 드러낸다. 반복적인 작업으로 이뤄지지만 저마다 다른 인간 군상처럼 그가 만든 패턴 중에는 똑같은 모양을 찾기가 힘들다. 이기봉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몽환적인 풍경을 극적으로 그려낸다. 안규철은 작품 ‘8개의 공’을 설치했다. 주황색 탁구공부터 적갈색 농구공까지 각각의 공들은 2m 높이에서 바닥으로 떨어뜨렸을 때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높이에 고정됐다. 작가는 이를 통해 무질서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것, 이질적인 것들을 모아서 하나의 전체를 만드는 것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전시는 12월 3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