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9호 윤하나⁄ 2016.11.11 17:14:41
바람에 휘몰아치는 갈대숲을 떠올려보자. 갈대들이 바람에 어지러이 움직이는 모습에 앞서 마른 갈대들이 부딪히는 시원한 소리가 먼저 귓가에 닿는다. 눈에 담은 이미지와 함께 감각으로 체득한 모든 것이 기억에 축적된다. 예술가들 중 다양한 감각을 활용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한진 작가에게 청각적 이미지는 특별하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지만 귀를 막아도 소리는 기어이 새들어오듯, 기억 저변에 깔린 소리로 작가가 발견한 풍경을 만나보자.
불안과 고통 상쇄하는 한진의 '백색소음'
아트 스페이스 풀에서 열린 한진 작가(37)의 ‘백색소음(White Noise)'전에는 기억의 소리가 이룬 풀숲의 지저귐이 가득하다. 백색소음은 일반적인 소음과 달리 귀에 쉽게 익숙해지는 소리로, 거슬리는 주변 소음을 덮어준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이 백색소음은 작가 한진에게 특히 각별하다. 그가 시각에 앞서 소리로 세상을 먼저 인지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주로 어떤 대상에 대해 시각 이전에 청각을 통해 감각하고 기억한다. 예를 들면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경우 누군가 첫인상에 대해 물어보면, 외적인 모습의 묘사보다 그 사람의 목소리에 대한 첫인상을 이야기한다”고 설명한다.
이어 “시각적 인식 전에 도달한 청각적 인식은 때로는 불안이 발현되는 지점이 된다. 그 불안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는… 끊임없는 물음이다. 이런 물음들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로 나아가게 한다”고 작업의 동기를 밝혔다. 실제로 전시에 걸린 유화 및 연필 드로잉 30여 점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띤 인물이나 동물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유화 작품에는 유독 독특한 질감 표현이 눈에 띈다. 거미줄이나 누에고치 같은 얇은 선이 수풀 전체에 조용히 내려앉거나, 기름을 많이 써 물감이 번지듯 흘러내린 얼룩이 기억의 메타포를 자극한다. 한진은 작가 노트를 통해 “기억 속 이미지들은 움직임의 겹과 결이 누적된 장소”라고 표현한다. 조금씩 물이 스며들 듯 감정과 기억이 쌓인 것처럼, 작가의 그림은 물방울이 생기기 직전의 습기를 머금고 있다. 이는 자신의 기억 속에 흔적처럼 남은 청각적 질감을 오랜 시간 집요하게 발굴해내듯 그림으로 한줄기씩 그려낸 것이다.
한편, 전시장 한편에는 가벽이 작품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비스듬히 서있다. 타 예술장르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특히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쿼드’와 ‘한갓 구름만’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왔다. “‘쿼드’에는 배우들 간의 대화나 특별한 사건이 없다. 오로지 정해진 궤도를 따라 배우들이 반복적으로 오고간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그린 궤도의 흔적과 운동성, 그로 인해 평소에 인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공간의 발견에 흥미를 갖고 작업했다"고 말한다. 여기에 ‘한갓 구름만’에서 발견한 ”어둠 앞에 선 응시와 사라짐의 반복을 통한 연속성“을 작품이 걸린 전시 공간에서 실험하기 위해 가벽을 설치했다. 관람객들은 가벽과 작품 ‘스민 밤 #2’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안팎의 공간을 관찰하거나, 그 사이를 오가며 작품과 전시 공간 사이를 유기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밖에도 전시장 외벽에 남겨진 못 자국과 구멍, 벗겨진 페인트 자국 등을 따라 벽화가 진행되고 있다.
작가는 시‧청각의 어긋남을 인위적으로 극복하려 하기보다 지속적인 작업이 주는 울림으로 불안을 상쇄시킨다. 이 지속적인 울림은 작가뿐만 아니라 보는 이의 불안과 고통까지 끌어안을 것처럼 깊고 사려 깊게 다가온다. 전시는 11월 1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