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영화 ‘가려진 시간’은 믿고 보는 배우 강동원과 신은수의 출연으로 화제가 됐다. 멈춰버린 시간 속 몸만 어른으로 자라버린 소년 성민을 연기하는 강동원과, 그런 성민의 말을 유일하게 믿어주는 소녀 수린이의 이야기는 사람들 내면의 판타지 감성을 자극했다.
그런데 이 판타지 감성을 더욱 극대화 하는 요소가 있다. 극에는 성민이와 수린이가 소통하는 언어, 즉 암호가 등장한다. 수린이가 만든 귀여운 비밀 암호를 노트에 번갈아 적으며 서로 소통한다. 수린이가 어른이 돼버린 성민의 말을 믿게 해주는 결정적 장치도 이 암호다. 어린 시절 누구나 몰래 간직했을 법한 비밀 장소와 암호는 사람들의 동심을 자극하고, 절로 미소 짓게 만든다.
그런데 이 암호, 왠지 익숙하다. 바로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해온 홍학순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윙크토끼와 지돌이를 중심으로 암호가 만들어졌다. 암호의 시초는 1998년 ‘윙크토끼 설계도’에서 비롯됐다. 동그라미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홍 작가는 동그라미 모양이 다 다르고, 각각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도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친해진 동그라미들끼리 짝을 지어주다가 사랑스럽게 윙크하는 윙크토끼가 탄생했고, 친구들도 연이어서 탄생했다. 그리고 이 친구들끼리 이야기하는 언어를 담은 것이 ‘윙크토끼 설계도’다.
한글이 아닌, 여러 무수한 동그라미들이 파생되는 과정을 담은 이 설계도를 지식 기반으로 그냥 보면 읽을 수 없다. 마음에 와 닿는 대로 읽어야 한다. 어렸을 때 인형놀이를 하면서, 또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거리낌 없이 인형에게 말을 건넸듯이. 어른이 되면서 마음에 달아버린 편견과 선입견의 빗장을 열고 순수하게 다가가면 윙크토끼와 친구들의 대화와 일상이 보인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거창하지 않은, 평범한 일상 속 발견할 수 있는 행복과 사랑이다.
이 윙크토끼 설계도가 엄태화 감독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 듯하다. 어느 날 홍 작가에게 전화가 왔다. 엄 감독이었다.
“1998년 영화 아카데미에 들어갔다가 졸업하고 한 2~3년 있다가 신입생들 대상으로 하는 오리엔테이션에 선배 감독 자격으로 초청받았어요. 거기서 윙크토끼 설계도를 선보였죠. 그런데 그때 신입생들 중 엄태화 감독이 있었나 봐요. 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후배라며, 자신이 쓴 시나리오에 암호가 등장하는데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게 ‘가려진 시간’ 시나리오였죠.”
홍 작가는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작업을 펼쳐 왔다. 회화뿐 아니라 드로잉, 조각, 애니메이션 등 많은 작업을 했다. 애니메이션 ‘계속 달리는 잉카씨’는 2009년 ‘인디애니페스트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올해 6월엔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이 작업들을 총망라하는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외 영화 작업에 참여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시나리오에 흥미를 느꼈다.
순수한 마음을 나누는 윙크토끼와 친구들의 이야기가 이뤄지는 홍 작가의 기존 작업과, 수린이와 성민의 순수한 우정과 믿음을 그리는 시나리오는 맞닿는 지점이 있었다. ‘마음 놓고 이 시나리오에 풍덩 들어가도 되겠구나’ 하고 느꼈다. 그렇게 홍 작가의 작업에 있던 윙크토끼와 지돌이를 포함한 암호 작업들이 ‘가려진 시간’에 놀러오게 됐다.
그림, 애니메이션, 영화까지 넘나드는 윙크토끼 친구들
작가들의 작업이 영화에 녹아드는 방식은 다양하다. 기본적으로는 영화의 주제와 연결되는 작품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그런데 홍 작가의 작업은 주인공 소년과 소녀 사이 소통의 중심이자, 이들의 내면을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특징을 지녔다. 수린과 성민의 비밀노트에도, 그리고 성민이 멈춰진 시간 동안 그린 벽화에도 암호가 등장한다. 그런데 홍 작가는 기존 윙크토끼 설계도를 바탕으로 하되, 이걸 그대로 가져오진 않았다. 그가 가장 먼저 몰두한 과정은 성민과 수린이의 마음으로 들어가기다.
“엄태화 감독은 ‘잘 부탁한다’고 하고 제게 구체적인 지시나 제한 사항을 주지는 않았어요.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작가에게 믿음을 실어준 거죠. 처음에 저는 그저 기다렸어요. 저는 인위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동그라미가 제게 말을 걸었듯, 이번엔 시나리오를 읽으며 성민이와 수린이가 자연스럽게 제게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죠. 그랬더니 어느 순간 성민이와 수린이가 제 마음을 두드렸어요. 그때부터 거의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노트에 암호를 적었죠. 홍 작가의 손이 아닌, 수린이와 성민의 마음으로요. 그저 캐릭터만 빌려주는, 영화적 도구로만 작업을 했으면 저 또한 재미없고 우울했을 거예요. 그런데 몰입이 되고, 성민이와 수린이가 마음속에서 살아나니 저절로 암호가 그려졌습니다.”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홍 작가는 ‘홍학순의 작업’이 아닌, ‘수린이와 성민이의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했다. 노트의 99.5%를 홍 작가가 수린이와 성민이의 마음으로 직접 써내려갔다. 수린이와 성민이의 비밀의 장소의 벽에도 암호를 빼곡히 채웠다. 그래서 ‘가려진 시간’ 속 암호는 이야기 속 또 하나의 이야기와도 같다. 성민과 수린이 보내는 하루하루가 노트에 암호로 적혔다. 그 일상은 평범하지만 행복하다.
그런데 여기서 암호의 특별한 변화가 엿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에 수린이 만든 암호는 단순하고 귀여운 형태다. 그런데 모든 시간이 멈추고 성민에게만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순간, 단순했던 암호는 좀 더 복잡해지고, 형태도 더 많아진다. 성민의 마음이 시로 표현되기도 한다. 노트에도 이 변화가 엿보이지만 성민이 그린 벽화에 가장 극적인 변화가 느껴진다. 여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모든 시간이 멈추고 혼자 남아버린 성민이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우리 관점에서 보자면 미쳤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평상시 인간의 잠재력에 내재된, 열리지 않은 감각이 열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멈춘 세상에서도 바람이 세게 불던 곳과 살살 불던 곳에서 느껴지는 바람의 감촉이 다르다는 걸 성민이는 느꼈을 거예요. 또 평소 흐르던 시공간과 전혀 달라진 환경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사물을 보는 태도도 달라졌을 거고요. 생각하는 방식도 조금씩 변해갔겠죠. 기존 세상이 주던 틀을 벗어났으니까요. 그렇게 오랜 시간 모든 감각들을 곤두세우다보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감각이 열려 한 차원 더 나아갔을 것이라는 거죠.”
성민의 아티스트적인 감각은 비누를 깎는 장면에서도 엿보인다. 수린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누 깎는 작업, 그리고 암호를 그리는 작업으로 풀었다. 나중에 멈췄던 시간이 풀린 이후에도 자신에게만 흐른 시간, 즉 자신의 인생 자체를 안 믿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민은 계속 암호로 수린과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환경도 더욱 성민이가 암호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는 것처럼.
“제가 생각하는 성민이는 진실한 아티스트예요. 영화 초반부에 ‘난 어느 곳에나 가도 잘 살 수 있어’라고 하는데, 멈춘 시간에서 모든 감각을 일깨우며 이 말을 실현시키죠. 그런데 누군가에게 보여주거나 전시를 하려는 목적도 아니고, 그저 순수하게 창의적인 태도로 세상과 마주해요. 그게 더욱 성민이의 감각을 발달시키지 않았을까요?”
비밀 암호 노트는 1000페이지에 달하고, 그림은 수린과 성민의 비밀 공간을 빼곡히 채웠다. 성민의 마음, 즉 ‘가려진 시간’ 속 성민의 변화한 세계관이 표현된 결과다. 그리고 이 변한 암호를 봤을 때 수린은 놀라지 않는다. 오롯이 성민의 변화와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성민과 수린의 암호는 단순히 귀여운 장난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소통의 의미를 지녔다. 윙크토끼와 지돌이, 그리고 성민과 수린의 만남은 이렇게 특별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정말 즐거웠어요. 꿈같기도 했고요. 아쉽지 않을 정도로 성민이와 수린이와 소통하며 작업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수린이와 성민이의 이야기를 더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요. 미디어 작품으로 만들거나, 책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더 보여줘도 재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저 또한 이번 작업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열어 제키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작은 화면으로만 만나보던 윙크토끼 친구들이 큰 화면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과정이 흥미로웠죠. 그림을 그려 전시하는 것과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어요. 기회가 된다면 또 이런 흥미로운 작업을 해보고 싶습니다.”